Wednesday, 21 December 2005

"불세출의 대타자" 장훈- 이야기 일곱

장훈 선수가 일본 사람이라도 나는 장훈 선수를 존경했을 것이다. 뭐 일본 사람들을 미국 사람이나 중국사람에 비해 더 싫어 하는것도 아니고 더 좋아하는것도 아니긴 하지만서도...

흔히 사람들이 말하길 정신력이 육체를 지배한다고 하나...나의 생각은 다르다. 몸을 지배하는것은 몸일뿐이며 정신을 지배하는것은 정신일 뿐이다. 정신력만으로 쎄미슐츠를 이길수는 없을테니까... 그야말로 최고의 정신력으로 초능력 단계에 들어서면 모를까, 일반인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듯하다. 얘기가 많이 새나갔지만...

암튼, 장훈 선수는 신체의 한계를 극복하고 그야말로 전인미답의 신기록을 세운 인물이다. 과정 또한 쉽지 않았으나 끊임없는 연습과 연습으로 일구어낸 기록이다. 자신의 핸디캡으로 변명하지도 않았지만, 어쩌면 더 큰 핸디캡인 재일 한국인이라는 사실은 당당히 들어냄으로서 일본에서의 편견을 이겨냈다.

여기 또한사람 한국인 영웅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역도산이다. 역도산은 자신이 한국인이란 사실을 끝까지 숨기면서 활동했다. 그러나 재일교포들은 모두 알고 있었으며 그래서 호랑이 자수가 들어간 경기용 가운을 선물했다나, 항상 이 호랑이 가운을 입었다는 얘기도 있고 아니다란 얘기도 있지만, 중요한건 장훈 선수와 역도산이 만났다는 것이다.

장훈 선수가 어릴적이라고 하는데 그게 언제인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프로입단 초가 아니였을까 짐작해본다.그때 장훈 선수가 역도산에게 물었다고 한다. 한국인은 우수한 민족인데 왜 한국인이란 사실을 밝히지 않는지...그때 역도산이 장훈 선수 머리를 치고는 한말이 "너는 아직 모른다"였다고 한다. 둘의 나이차이가 15년 정도 나니까 이런 말을 했을것이다.

일본인이 미국인을 때려눕히는 통쾌함을 바라는 관중들의 심리를 역도산은 알고 있었던 것이며 또한 펜들이 있음으로 자신이 있다는 것을 그는 잘알고 있었을것이다. 확연하게 들어나는 두사람의 생각은 그 이후의 다른 기록에서 찾을수없다. 물론 그후 역도산의 절명으로 만날수는 없었을 테지만....

한국의 야구인들에게 물으면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는 분이 바로 장훈 선수이다. 야구선수 생활 23년간 정말 꾸준한 성적을 기록한다는것, 이것은 정말 존경 그이상의 가치가 있다. 지난 90년 7월 24일 요코하마 야구장네서 장훈 서수는 올스타전 경기에 앞서 수많은 관중들의 박수를 받으며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몇년전 있었던 역대 일본 야구선수를 통털어 베스트9을 뽑는 여론조사에서도 장훈 선수는 당당히 베스트9에 뽑혔다. 설문응답자들의 연령이 대부분 20,30대 였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더더욱 놀라운 사실이다.

장훈 선수의 사진들을 보면서 이제 감동을 더 느껴보자.




도에이 플라이어스 시절

니혼햄 파이터스 시절 - 배트로 투수를 가리키는 모습은 투수들에게 위협적이였다고함...그러나 장훈 선수는 그저 구장을 반으로 정확히 나누기 위한 준비였다고만 한다.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이승엽 선수는 무엇을 물어보는 것일까?





Thursday, 27 October 2005

"불세출의 대타자" 장훈- 이야기 여섯

자이언츠에서 제 2의 황금기자이언츠에서의 선수생활은 30대 중반을 넘긴 장훈 선수에게 제 2의 황금기였다. 프로 입단 4년 만인, 만 21살때 타율 3할3푼3리. 홈런 31개로 MVP에 오르고 수위타자 7번이라는 경이적인 기록 이후, 쎈트럴 리그 요미우리로 이적전 1975년 장훈 선수의 타율은 상대적으로 저조한 .276 그러나 자이언츠 이적 첫해, 무려 182개라는 경이적인 리그 최다 안타와 .355를 기록한다. 새로운 리그에 대한 적응 차원을 넘어 양대리그 수위타자를 향한 성적이였다, (타율조작만 아니였다면,,,,) 그야말로 관록이 붙을 때로 븥은 장훈 선수였던 것이다.

장훈 선수의 투입이 얼만큼 팀에 공헌 했는가 하는것은 성적이 증명한다. 장훈 선수가 이적한 첫해와 다음해, 자이언츠는 리그 우승 ( 재팬 시리즈 우승은 실패 )으로 보여진다.


NHK-TV 장훈 선수 다큐멘터리 제작
장훈 선수의 활약을 에상했기 때문이였을까? 1976년 NHK-TV는 자이언츠로 이적한 장훈 선수에 대한 다큐멘타리를 제작한다.



NHK-TV 에서는 장훈 선수의 오른손을 촬영하고 싶다는 요청을 한다. 아마도 여러 시련을 이겨낸 모습을 그리고 싶었을것이다. 재일 한국인이라는점과 신체의 장애 까지.... 그러나 장훈 선수는 단호히 거절한다. 어머니에게도 보여 주지 않기로 했는데, 매스컴을 통해 공개할 수는 없다는 것이였다. 앞서 다른 포스트에서 썼지만 장훈 선수는 자신의 자신의 핸디캡을 자랑하지 않는다. 장훈 선수는 사실 몇년전 모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손을 보여준적이 있다. 시간이 많이 흐른 뒤라 그런지 촬영을 허락했던 것인지 기자와의 특별한 인연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오른 손이 잘 구부러 지지 않는 상태인데, NHK-TV 도 그것을 놓지고 싶지는 않았을테지만 결국 오른 손을 찍지는 못한다.


불멸의 기록 통산 3085 안타
여러가지 기록중, 장훈 선수의 가장 큰 기록은 일본 프로야구에서 앞으로도 깨지기 힘든 불멸의 기록 통산 3085 안타. 야구에서 말하는 여러 기록들이 있지만 역시 통산 기록이 그 선수를 말해준다. 한해 반짝하는 기록보다는 꾸준한 성적을 내어왔다는 것인데 이쯤에서 일본 프로야구 역대 기록을 살펴보자



다른 선수에 비해 안타는 많고 삼진은 적어
일본 야구에서 거의 신 대접을 받는 나가시마, 노무라, 왕정치(오 사다하루)도 평균적으로 보면 장훈 선수의 성적에 미치지 못한다. 장훈 선수는 타격의 전부분에 있어서 고른 성적을 내고 있으며, 특히 알짜배기 기록인 개인 통산 안타와 타율 부분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최다안타 부분에서 장훈 선수, 노무라와 오 사다하루가 1, 2,3 위인데 무슨 확연한 차이라고 말하신다면 계산 들어가겠다. 안타 부분에서는 장훈 선수가 1위 그러나 출전 경기수에서는 노무라 1위, 오가 2위 장훈 선수가 3위

노무라와는 265 게임이나 덜 뛰고도 184 안타를 더 친것이며
오와는 79게임을 덜 뛰고도 299 안타를 더 친것이다.

홈런과 타점 부분은 오가 뛰어난 타자였은 틀림없지만, 강팀인 자이언츠에서 거포로 키워진점을 감안 해야 한다.상대적으로 약체인 도에이와는 상황이 다르니까. 베이스에 주자가 있어야 타점을 많이 올리지 주자가 없는데 무슨 타점이 많이 올라갈 턱이 없지 않은가.

다음은 삼진 기록을 보자. 장훈 선수는 통산 삼진에서도 815개밖에 당하지 않았다. 앞서 말한 다른 타자들은 1300 개를 훌쩍 넘기고 있다. 그러니까 경기는 장훈 선수보다 많이 출장 했지만 안타는 적고 삼진은 많은 경우인데



노무라는 265 게임 더 출장 663개 삼진을 더 당함
오는 79게임 더 출장 504개의 삼진 더 당함

그래도 이들은 은퇴후 감독도 하고 나름대로 잘나갔지만 장훈 선수는 구단에 강사로 초빙만 되었을뿐 감독의 자리에는 오르지 못한다. 그러나 이부분에 있어서는 장훈 선수의 입장은 단호하다. 프로 구단에서 감독 제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거절했다고 한다. 자신은 '감정적임으로 감독은 어울리지 않는다는것' 그러나 그 다음 나온 말은 충격이였다. 선수시절에도 차별받고 공격당했다는것 감독이 되면 더 힘들어 진다는것. 개인적으로는 견딜수있었지만 가족들에게는 그런 고통을 주고 싶지는 않은 가장의 모습....


3085 안타
4년간의 화려했던 자이언츠 선수 생활후, 1980년 장훈 선수는 롯데로 이적하며 지명타자로 전환한다. 그리고
1980년 5월28일 3000 안타를 기록한다. 장훈 선수의 개인 통산 안타수는 3085 안타. 현재 장훈 선수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3000 안타 이상을 기록한 일본 프로야구 선수는 없다.

3000 안타의 순간은 그야 말로 극적이였다.


3000 안타를 기록하는 순간. 장훈 선수의 3000번째 안타는 홈런 !!!




훈장 수여 장면

1980년 9월 28일에 이미 3000 안타와 500 홈런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모두 만들었지만 장훈 선수는 은퇴를 유보 하고 일년간의 선수 생활을 더 한다. 이유는 롯데의 신격호 회장과의 약속 때문이라고..장흔 선수는 1년 더 뛰는 바람에 통산타율에서 3할 2푼대를 지키지 못하고 은퇴해야 했다. (통산타율 .31916). 그러나 장훈 선수는 <'나의 인생, 나의 야구 일본을 이긴 한국인 장훈' 중에서>말했다" 23년간 나의 야구인생에 결코 후회는 없다."

Monday, 26 September 2005

"불세출의 대타자" 장훈- 이야기 다섯

순전히 실력 하나로만 일본 프로 야구 퍼시픽 리그 최고의 타자로 자리잡으며 일본 최고의 강팀인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스카웃된 장훈 선수, 지금까지는 재일 한국인인 장훈선수를 쫒아다니던 차별과 멸시는 없는듯 해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포수들은 상대팀 타자의 기분을 상하게 하기 위해서 이른바 말로 '겐세이'를 거는데, 관중들 까지도 장훈 선수가 타석에 들어서면 야유가 쏟아져 나오곤 했다. 주로 내용들은 마늘냄새 김치냄새 등등, 이럴때면 항상 장훈 선수는 더욱 악착같이 안타를 쳐야겠다고마음 먹었다고 한다.

또한, 장훈 선수는 투수가 빈볼을 던지면 아주 강하게 어필했다. 이것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함이였으나 이런 모습이 폭력적인 이미지가 더해지는데 한몫했다고도 볼수있다. 그러나 실제로 일본에 진출한 한국인 타자들 이종범( 공에 맞아 오른쪽 팔꿈치 부상), 이승엽 ( 몸에 맞는공과 위협구 때문에 첫해 고전 ) 등이 투수들의 빈볼성 공에 고전했다. 만약 장훈 선수 같이 강하게 어필 했다면 아마도 투수들이 더 고전했을지도 모를일이다.

장훈 선수는 강한 어필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단한번도 먼저 때리거나, 심판에게 퇴장명령을 받은 적은 없다는 것이다. 빈볼에 때문에 투수를 때린적도 있지만 먼저 때린것이 아니며 , 심판이 '이젠 그만해'라고 하면 바로 그만했다는 것이다. 화가 나지만 참을 때 참았다는 것인데 어디 그게 쉬운일인가 말이다.



장훈 선수와 왕정치 선수

일본 사람들이 장훈 선수를 폄하할때 곧잘 왕정치 선수와 비교 한다. 장훈 선수와 왕정치 모두 일본인이 아니지만 왕정치는 신사적이 라는 것이다. 그러나 왕정치는 귀화를 했다. 일본은 사회적으로 귀화한 사람들에게 대해서는 공격적이지 않는다. 또 요미우리가 어떤 회사인가? 언론 재벌아닌가, 따라서 왕정치 선수에게 비신사적인 행동을 한 선수는 바로 그다음날 비겁한 선수로 낙인이 찍히게 된다. 정면 승부를 하지 않은 투수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장훈 선수는 귀화도 하지 않았고 소속팀의 방패도 없었다 다만 기자들에게 폭력적인 이미지가 추가되어 아주 좋은 '기사감 이 였던 것이다.

히로시마 폭력 사태
1976년, 자이언츠의 히로시마 원정경기때, 폭력사태가 벌어진다. 9회 초, 1점차로 뒤진 자이언츠의 마지막 공격, 2루에 있던 주자가 안타때 홈에 들어오다가 아웃이 된다. 이때의 판정시비로 감독이 항의하러 나가는데, 갑자기 관중이 한사람이 그라운드로 내려와서 방망이를 가지고 감독을 때리러간다. 이것을본 벤치에 있던 자이언츠 선수들이 나가게되고,폭력사태가 벌어지는데 문제는 그이후에 벌어진다

경기가 끝나고 나가서, 버스를 타려는 자이언츠 선수들에게 200~300명 정도의 관중이 달려든다. 서둘러 버스에 오르는 장훈 서누를 잡고 늘어지던 시민을 발로 차고 장훈 선수는 버스 계단을 오르지만 또 달려드는 관중을 배트로 후배 선수가 팍 친다 ( 찌르듯이 쳤을것 ). 배트에 머리를 맞은 관중은 피를 흘리며 「하리모토에게 얻어맞았다」고 소리를 지른다. 그 다음날 장훈 선수는 누명을 쓰게 되고 신문의 머리기사를 장식하게 되는데, 급기야 장훈 선수의 어머니 댁에는 돌까지 날아든다.

장훈 선수에게 인삼-닭고기 ( 인삼과 닭고기인지 삼계탕인지 모르겠음 )를 주려고 구장에 와있던 어머니와 형님은 그 상황을 옆에서 보고 있었던것. 어머니는 「왜 사실을 밝히지 않느냐」. 「네가 하지 않았다는데, 형이 옆에서 봤다는데, 후배가 했다고 하면 될 거 아니냐」하셨으나, 장훈 선수는「엄마, 나를 도 와주려고, 내가 맞으려고 하는 것을 막아주 려고 후배가 중간에 들어와서 내대신 한 일인데, 어떻게 제가 말을 하겠습니까. 기다려 주세요. 꼭 진실은 나중에 알려질 테니까」라고 말하고 경찰 조사에 응한다.

조사중에도 사실은 후배가 배트로 시민의 머리를 쳤다고 했으면 쉽게 끝날일이였으나 장훈 선수는 계속 「안했다」고만 했다고 한다. 이 조사는 한달 넘게 끌면서 순사-경사-경시정(? 꽤 높은 직책인가봄 )과도 대면을 하게 되는데 이때 장훈 선수는 「진실은 하나다」라고만 말하자 잠시후 모든 수사 의뢰를 기각 시켰다나. (장훈 선수도 멋지지만 경시정인가 하는 사람도 꽤 멋진 사람인다) 암튼 그렇게 시간이 흘러 또 한달가량 시간이 지났을 무렵 후배가 시민을 배트로 때리는 사진 공개 되면서 매스컴에 진실이 밝혀진다.

이부분은 상당히 언론의 암묵적 동의가 있었던것 같다. 증거 사진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 기자인지 시민인지는 모르지만 시민들이 몸싸움 하는 과정에 버스 앞까지 가서 사진을 찍을 시민이 있을까?라고 생각하면 위에서 설명한 '기사감'은 상당히 설득력을 갖는다. 증거 사진을 히로시마폭력사건 이후 무려 두달이 지나서야 발표한 것인데. 뒤늦게 특종을 노리던 기자의 욕심이였을까? 아니면 장훈 선수를 끝까지 폭력적 이미지의 선수로 남게하려 했던 것일까?

그런데, 특이한점은 이 사건 발발 직후 기자들이 찾아간 곳이 있었으니 거기는 다름아닌 히로시마의 우리 민단 ( 재 일본대한민국 거류민단 )이다. ( 사실 이부분에 대해 뭐라 논하기는 난감했지만 그냥 내 블로그니 내맘대로 쓰련다.) 이상하지 않은가? 재일 한국인이였지만 일본에서 태어났으며 외국인 선수 규정까지 바꾸면서 뛰게된 선수가 장훈 선수다. 박찬호 선수가 이단 옆차기 했을때 한국 대사관 와서 인터뷰 하는 기자가 있었나? 이것은 폭력사건을 장훈 선수 개인의 일에서 재일 한국인 전체의 일로 확대 하려는 일본 언론의 의도 이외에 무엇이 있나 말이다. 작은 사건을 국가적인 이미지로확대 하려는음모. 이런것이 일본 넘들이 주로 하는 수작인데.....씁쓸하다.

히로시마 펜들에게 사과를 받다.
결국 진범이 밝혀진뒤, 또 히로시마 구장 경기중. 관중석에서 좌익수를 보던 장훈 선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처음에는 야유소리라고 생각하고 뒤를 보지 않던 장훈 선수는 계속되는 「하리모토!」소리에 뒤를 돌아본다. 몇몇 사람이 머리를 박박 깎고 무릎을 꿇고 앉아. 잘못했다고, 자기들이 오해했다며 사과를 한것. 장훈선수도 15세까지는 히로시마에서 태어나서 살았으니 히로시마 사람이나 다름없었던것. 하지만 유독 76년 히로시마를 상대로 맹타를 휘두르던 장훈 선수를 곱지 않은 눈으로 보는 히로시마 펜들이 많았다니 이또한 재미있는 점이다.






1976년, 빼앗긴 타격왕?
1976년은 요미우리 이적 첫해이다. 그런데 기록을 보면 의문점이 생긴다. 130경기에 출전해서 리그 최다 182 안타를 쳤다. 타율 .355 그러나 타격왕은 장훈이 아니였다. 최다안타가 최고 타율까지이 되란 법은 없지만.....의문이 생긴다

시즌 막판까지, 장훈 선수는 주니치의 야자와 겐이치(谷澤健一)와는 모(毛) , 할,푼,리,모 10000분의 일까지 겨루는 치열한 타격경쟁을 벌이고 있었다고 한다. 자이언츠의 리그 마지막 경기는 나고야에서 홈팀 주니치를 상대하게 된다. 장훈 선수의 강습타구는 필사적으로 슬라이딩한 유격수의 글러브 끝을 스치고, 2루 베이스와 유격수 사이를 꿰뚫었다. 그러나 잠시후, 전광판에는 '실책'으로 기록이 되자,자이언츠의 코칭스태프와 주력선수들이 일제히 뛰쳐나와 기록원석을 향해 항의를 하고 기자석에서는 격렬한 야유가 터졌으나 판정이 번복되진 안았다고 한다.

당연한 안타를 실책으로 기록하는 히로시마
강습 타구의 경우는 기록이 안타로 나는게 정상이다. 만약에 야수 정면으로 향하는 강한 타구를 잡지 못했다면 실책으로 기록되는것이 당연하지만 슬라이딩 캐치를 실패 했다 하더라도 실책으로 기록되지는 않는다. 다만 슬라이딩 캐치후에 송구 동작에서 일어난 실수라면 실책이겠지만 쪽발이들의 치졸함이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미 얼마 전 다른 경기에서도 이와 비슷한 불리한 판정을 받은 일이 있는 장훈 선수의 분노는 자못 컸다. 더우기 1루 베이스 위의 주자 장훈 옆에 서 있는 주니치 1루수가 얄궂게도 바로 경쟁상대인 야자와였다. 그래도 장훈은 그 시점에서 타율이 약간 앞서 있었지만 다음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야자와가 3타수 3안타를 치면 1모 차로 역전될 형세였다. 그런데 만약 장훈 선수의 이번 타구가 안타로 기록되었으면 야자와는 다음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5타수 5안타를 쳐야 이기는 상황이였으니 음모 말고는 다른말로 뭐라 하겠나. 역시 일본 넘들은 치사하고 야비한데...주도면밀까지 했으니....

야자의 소속팀인 주니치의 다음 경기는 시즌 마지막 경기로 대 히로시마 원정 경기. 히로시마의 재일동포 투수 가네시로 모도야스(金城基泰)는 마치 '쳐 주십시오' 하듯이 야자와에게 스피드를 죽인 직구를 한가운데로만 던지고 내야수는 타구를 끝까지 쫓아가지 않는 따위의 낯뜨거운 더티플레이로 기어이 3안타를 만들어 주어 수위타자 타이틀은 야자와에게 돌아갔다.역시 일본인들의 주도 면밀함은.... 한국인을 이용한 한국인 죽이기랄까? 언제나 앞잡이를 내세우는 이런 비열함에 또 고스란히 이용당하는 앞잡이들.

이 앞잡이 사진 우선 공개-짠물-삼미수퍼스타즈 홈페이지에서 퍼옴
이런 얼굴인 남자들은 만나지 않는것이 좋을듯-기분 나쁘니까 자주 보지도 말것
나중에 짧게라도 이 선수에 대한 글을 쓸것임, 왜냐면 또 꾸물꾸물 우리나라로 와서 선수생활을 2년 동안이나 했으니까

정정 당당한 승부였다면 누가 무어라 하겠냐만은 너무나도 일본 프로야구사에 부끄러운 기록으로 남을것이다. 잘해도 너무 잘한 장훈 선수 탓을 할수는 없지 않은가. 타격왕이라는 자리를 무려 7번이나 차지한 이후 만약 장훈 선수가 또 수위타자 자리에 올라간다면 일본 프로야구 역사상 양대리그 타격왕이 탄생하는 중요한 순간이였던 것이다. 장훈 선수는 이 판정만은 지금껏 체념을 못하고 있다고 하는데 ...암튼 타율이나 알아보자....

야자와의 타율이. 3548, 장훈 선수가 . 3547 ...........
결과는 장훈 선수의 1모차의 패배였지만 일본 프로야구사를 더럽힌 타율 조작이였던 것이다.

다음은 장훈 선수의 이어지는 활약상과 역도산과의 내용이 이어집니다.

Friday, 16 September 2005

"불세출의 대타자" 장훈- 이야기 넷

광각 타법이란?광.각.타.법. (廣角打法) 이것은 장훈 선수를 얘기할 때 빠질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광각타법이란 무엇인가? 흔히 타자들의 타구 방향은 어느 정도 한쪽으로 치우치게 되있다. 우중간이라던 지 좌중간이라던 지...따라서 벤치는 그런 데이터를 바탕으로 수비진의 쉬프트를 변경시킴으로서 안타성 타구를 잡아내는 경우를 보았을 것이다.그러나, 광각타법은 타구의 방향이 좌우 가리지 않고 골고루 퍼져 나간다. 따라서 광각타법이외에, 부채살 타법, 스프레이 타법 등으로 불리는 타법이다. 투구의 코스를 거스르지 않고 당기고 밀어서 좌·중·우 어느 쪽이건 원하는 방향으로 타구를 날려 보낼 수 있는 고난도 기술의 타법인 것이다.

몸쪽 공을 당겨 친다거나 바깥쪽 공을 밀어 치는 것은 비교적 가능한 것이지만 그와 반대로 몸쪽 공을 밀어치고 바깥쪽 공을 당겨 치는 타법, 원하는 방향으로 타구를 보낼 수 있는 타법이며 아주 효율적으로 안타를 만들 수 있는 타법이 바로 광각 타법인 것이다. 예를 들어 주자가 일루에 있다면 일이루간은 넓어져서 그사이로 공을 굴려 보내기만 하면 안타가 나오는 것이다.

5~6년간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광각 타법이 완성된 것은 장훈 선수가 약 24세 무렵이라 한다. 1967-1970 까지 4년 연속, 리그 수위 타자인 타격왕을 차지한다. 그러자 붙여진 별명이 바로 안타 제조기이며 장훈 선수의 타법에도 광각타법이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된 것. 얼마나 이 광각 타법이 유명했는가 하면 장훈 선수가 은퇴 후에 각 구단에서 장훈 선수를 초빙해서 광각타법을 강의 하도록 할 정도 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야구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장훈 선수의 광각 타법을 가장 잘 따라하는 선수는 스즈키 이치로 라는 말도 있다. 그만큼 장훈 선수의 광각타법은 계속 일본에서 이어져 왔던 것이다.

도에이 플라이어스는 니타쿠 홈 플라이어스로 이름이 바뀌고 다시 니혼햄 파이터스로 바뀌게 되는데 그사이 장훈 선수는 타격왕 7번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1975년 .276라는 저조한 타율로 75년 시즌을 마감한다. 그때 나이가 우리나이로 벌써 36살 이였다. 그런데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장훈 선수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온다. 왜 일까???


창단 후 첫 꼴지를 기록한 자이언츠 장훈 선수가 필요하다
일단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어떤 팀일까? 간단하게 말하자면 65년부터 73년 까지 무려 9번의 일본 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국가대표 프로 야구팀이라고 할 만한 팀이다. 거의 일본인중 40%(혹은 그 이상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으나)가 좋아할 정도의 강팀이다. 그런데 팀 내의 4번 타자 「나가시마 시게오」(長嶋茂雄)가 은퇴 후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감독으로 부임한 첫해, 꼴찌를 하게 된다.73년까지 우승했었는데 감독이 바뀌자 바로 꼴지 ㅋㅋ 나가시마 감독의 경기 운영 미숙을 보여주는 여러 일화중 하나가 바로 몸을 풀고 있는 투수대신 벤치에서 앉아있던 투수로 교체한다던가 등등 인데 암튼 그는 실력보다 운이 좋았고, 능력보단 외모가 뛰어났다.

원래 자이언츠의 중심 타선은 ON포로 불리던 왕정치와 나가시마였다. 「O」는 868개의 홈런으로 홈런 세계 최고 기록을 가지고 있는 왕정치(王貞治)의 일본발음인 「오 사다하루」의 이니셜이고 , 「N」은 역시 1960년대 일본 프로야구 최고 인기선수의 한 사람이었던 「나가시마 시게오」(長嶋茂雄)의 이니셜이다. 두 사람은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최전성기인 1960년대 3, 4번을 치면서 요미우리의 일본시리즈 9연패를 이룩했던 주인공들. 당시 언론에선 이 두 사람을 합쳐 무적의 「ON 타선」이라 불렀다. 이부분에 있어서, 프론트와 벤치의 분석은 나가시마와 같은 중심타자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일리 있는 말이지만 나가시마의 팀운영 미숙이 한몫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혼자 있는 강타자는 투수들이 왕정치 하나만 공격하면 되기 때문에 아무리 강타자가 잇는 타순이라도 혼자 있으면 그 힘이 발휘되기 힘들다. 암튼, 왕정치 혼자 있는 중심 타선을 보강하기위해,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퍼시픽리그 최고타자 장훈 선수를 모셔오게된다. 이로서 「OH타선」이 만들어 지는데, 여기서 「H」는 장훈 선수의 일본 이름인 「하리모토」에서 따온 것인데, 얼마나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나가시마 감독이 장훈 선수를 원했는지, 당시 장훈 선수가 몸담고 있던, 니혼햄의 오자와 감독( 나가시마 감독의 릿쿄대 선배) 에게 직접 장훈 선수의 요미우리 트레이드를 요청하지만 거절당한다. 그러자 이번에는 구단주까지 찾아가 설득함으로서 결국 트레이드를 성사 시키게 된다. 이미 이당시 장훈 선수의 나이는 30대 중반을 넘어 서고 있었음으로, 나이가 있는 선수를 데리고 오고 싶어 하지는 안았을 테고, 꼴찌를 기록한 감독이었으니, 그만큼 절실하게 믿을 만한 선수가 필요했을 것이다.


위의 사진은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홈페이지에 실려있는 사진이다.

打者に必要な全てを兼ね備えた天才打者だった。 타자에게 필요한 모두를 겸비한 천재 타자였다。

장훈 선수는 76년 자이언츠로 이적 했으니, 우리나이로 이미 37이었는데도 요미우리 입단후 맹활약을 펼친다. 결과적으로 나가시마에게 76,77 쎈트럴 리그 우승을 안겨주는데 공헌하였지만, 실력보다 명성이 부풀려져 있던 나가시마 감독이 이끌던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재팬 시리즈에서 76, 77 모두 한큐 브레이브스에 시리즈 스코어 4-3, 4-1로 무릎을 꿇고 만다. 아무리 생각해도 감독의 운영 미숙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다시 한번 드는 건 왜일까?



지금까지 실력 하나로 순탄한 프로 생활을 한듯 보이는 장훈 선수의 기록들 ....그러나 가려진 고난의 기록과 또 치열한 승부 그리고 통산 3085 안타라는 불멸의 기록까지는 다음으로

Saturday, 27 August 2005

"불세출의 대타자" 장훈- 이야기 셋

드디어 프로 야구 선수의 시작1959년 고졸 신인으로 도에이에 입단한 장훈 선수는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아마야구 선수에서 드디어 프로야구 선수로서 59년 시즌 첫 경기에 출전 한다. 포지션은 좌익수 그리고 타순은 6번. 그러나 프로 데뷔 첫 타석에서 장훈 선수는 3구 3진을 당한다. 그냥 3진도 아니고 3구 삼진..... 그리고 수비때에는 실책까지 범하면서 호된 신고식을 치루면서 교체되어 벤치에서 남은 경기를 지켜본다.

그리고 숙소로 돌아온 장훈 선수는 밤새도록 스윙연습을 하면서 타격감을 찾으려고 노력을 하고 바로 다음날 경기 첫 타석에서 2루타 , 그 다음 타석에서 홈런을 치며 본격 궤도에 오른다. 6번타자에서 5번 타자를 거치면서 데뷔 첫해 6월 하순부터 4번 타자가 된다 . 일명「19세의 4번 타자」로 신화같은 기록을 남기며, 첫 해 125경기에 출전, 2할7푼5리, 13홈런 57타점으로 신인왕이 됐고, 두 번째 해에 3할을 넘기게 된다. 신인왕 선정에 대해 장선수는 3할 미만의 타율과 한국인이라는 점 때문에 염려 했다고 하지만 기자단 투표에서 141표중 111표를 얻어 압도적인 표차로 신인왕에 선정됐다.

어쩌면 .275가 낮은 타율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일본 프로 진출을 선언한 아시아 홈런왕 이승엽의 첫해 목표가 .29이라는점을 감안 한다면 고졸신인으로는 결코 낮은 타율이 아니다. 또 어쩌면 다른 선수들이 못했기 때문에 신인왕에 뽑혔을거라고 폄하하려는 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 프로야구는 신인왕을 의무적으로 뽑지는 않았다. 59년 장훈 선수를 신인왕으로 뽑았던 퍼시픽 리그는 이듬해 '대상자 없음'을 선언했고, 이후에도 5차례나 더 신인왕을 뽑지 않았다. 가장 최근으로는 2000년에 대상자가 없었다. 센트럴리그도 63년부터 75년까지 4차례나 신인왕을 배출하지 않았을 정도로, 일본 프로 야구는 해당자가 없는 해에는 신인왕을 뽑지 않음으로서 신인왕 타이틀에 대한 권위를 지켜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함께 입단 했던 왕정치는 어땠을까? 고시엔의 스타로 요미우리에 입단한 왕정치(王貞治-오 사다하루).그는 계약금 1800만 엔의 ( 11만 엔의 월급) 이었고 장훈 선수는 계약금 200만 엔, ( 월급 4만5000엔) 이였다. 장훈 선수에 비해 엄청난 금액. 아마도 장훈 선수가 고시엔에 출전했더라면 하는 생각도 해보지만. 암튼 왕정치는 무려 27 타석째에 첫 안타를 치고 첫 해 타율도 1할6푼1리였다. 왕정치 선수를 폄하하려는것이 아니다. 그는 홈런 타자로 키워졌던 것이다. 강팀중에 강팀이던 요미우리로서는 평범한 타자보다는 간판 홈런 타자를 원했던 것이고 계속 큰스윙만을 하도록 왕정치를 훈련시킨 것. 간혹 왕정치와 장훈 선수를 놓고 장훈 선수는 홈런을 많이 치지 못했다고 하는 말을 하는데 홈런 기록만 미리 밝히자면 장훈선수의 통산 홈런은 무려 504개로 역대 일본 프로야구 홈런부분 6위를 기록 하고 있다.

귀화 국적을 바꾸지 말고 구단을 바꿔라

장훈 선수에 대한 이야기를 할때 빠지지 않는것이 귀화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귀화를 하건 안하건 그게 중요진 않다. 특히 일본에서는 말이다. 차별이고 뭐고를 떠나서 한가지 예만 들어보자면, 프로야구 선수들의 해외 전지 훈련때 한국인이던 장훈 선수는 항상 한국을 경유해서 훈련지에 도착했었다고 한다. 물론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당시로서 귀화는 아주 현실적인 문제였다. 그런데 어느날 장훈 선수에게 구단주 오오카와(大川) 가 계약금 인상과 함께 귀화를 권유한다. 형식은 자신의 양자로 해도 좋다고 말할정도로 아주 파격적!!!. 구단주의 생각은 장훈 선수가 외국인으로 되어있어서 외국인 선수 보유 3명중 한명을 차지하는 장훈 선수를 귀화 시킴으로서 팀전력의 상승을 기대했던것이다.

어머니와 가족들에게 이문제를 이야기하자 장훈 선수의 어머니의 말씀은 한마디로 "안된다" 였고 국적을 바꾸느니 구단을 바꾸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이이야기를 전해들은 구단주는 ' 아, 정말 훌륭한 어머니를 두었다"라고 한후 장훈 선수 한명을 위해서 프로야구의 외국인 규약 자체를 바꿔준다. 오오카와 오너는 퍼시픽 리그의 의장을 맡고 있었음으로 끝발이 좀 있었나부다. 암튼 「1945년까지 일본에서 태어난 선수는 일본인과 똑같은 규약이 적용되는 것으로 본다」 이렇게 바꾸면 적어도 외국인 규약에서는 장훈 선수도 일본인과 똑같은 대우를 받으니, 한국 국적을 버리지 않아도 팀은 3명의 외국인 선수를 확보할 수 있었다.


연습
프로 생활동안 줄곧 3할을 유지했더너 장훈 선수의 비결은 무엇이였을까? 비결은 역시 장훈 선수의 끊임없는 노력이었다. 도에이 시절 베팅 케이지에 한번 들어갔다 하면, 본인이 싫증을 느낄 때까지 타격연습을 한 뒤에야 다음 선수와 교대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러고도 모자라 밤에는 손바닥 굳은살이 헤져서 배트 손잡이가 피로 물들고, 스텝한 앞발로 인해 여관방 돗자리가 헤질 때까지 연습으로 지샌 밤이 수없이 많았다.

화상을 입어 붙어 버린 오른손 때문에 오른손의 악력이 많이 부족했던 장훈 선수는 타격코치 마쓰키 겐지로(松木謙治郞) 의 지시대로 오른손 한손으로만 하루에 500개 배팅을 1년 정도 한다. 프로야구 시즌이 개막중일때도, 또 끝났을 때도 쉬지 않았으며. 경기가 있을 때는 경기 시작 전에 하기도 하고 경기를 마치고 하기도 하고 매일같이 하루에 한손으로만 500개의 스윙이 아닌 배팅을 소화하면서 강타자의 면모를 더욱 다듬어 간다.


4번 타자가 도루 41개
1959년 입단해서 신인왕으로 출발한 장훈 선수는
60년 베스트 9, 61년 타격왕과 베스트 나인 62년에는 출루율 1위, 타격왕 베스트 나인 그리고 MVP까지 거머쥐면서 재팬 시리즈 우승으로 팀을 이끈다.


1963년 장훈 선수는 무려 41개의 도루를 기록한다. 타격 못지 않게 발도 빨라 그야말로 '호타준족' 또한 다음해에는 볼넷도 92개. 선구 안도 좋았던 장훈 선수는 볼넷을 많이 골라 내면서 상대 투수를 괴롭히면서 자신의 타율을 유지하는 비결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또하나의 비결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광각타법'이라는 장훈 선수만의 비밀이 있었다.

Saturday, 20 August 2005

"불세출의 대타자" 장훈- 이야기 둘

자 이제 장훈 선수의 고교시절을 알아보자. 앞서서 말했듯이 고시엔에 대한 큰 꿈을 안고 단식투쟁으로 전학까지 갔던 장훈선수.


폭력훈련
장훈 선수가 나니와 상고 일학년때, 학교는 '폭력훈련' 사건에 휘말리게된다. 우리나라는 지금도 그렇지만 예체능 계열의 학교에서 군기를 명목으로 줄빠따가 있는데, 바로 이런 사건이 50년대 중반 일본에서도 있었고 또 그당시에도 물의를 일으켰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사건은 야구부가 아닌 다른 체육부에서 있었던 일이 였는데, 나니와 상고 전체가 일년간 출장 정지 처분을 받게된다. 그렇게 2학년 말까지 장훈선수는 시합출전을 하지 못하고 훈련에만 매진 한다.

드디어 2학년 말에 출장 정지가 풀리면서 근처 학교와 두달간 13 게임을 치루는데, 성적은 타율 5할6푼, 홈런 11개. 그중 홈런 하나는 정전 홈런으로 유명하다. 장훈 선수의 홈런 볼이 전신주를 맞췄는데, 그지역에 정전사태가 벌어진것. 이런 만화 같은 사건이 실제로 장훈 선수에게 있었다. 그리고
장훈 선수의 이야기를 그린 만화가 허영만씨의 "질수없다" 표지, 만화로선 드문 논픽션 만화 그러나 읽다보면 정말 '만화'같은 장훈 선수의 이야기

이제 출장 정지도 풀려서 장훈 선수는 그야 말로 피나는 연습으로 하루하루를 보낸다. 학교에서 연습을 마치면 선배들이 먹을 것을 사줬다고 한다. 뭐 도너츠 같은 거라고 하는데 암튼 배를 채우고 곧바로 강변에 묶어놓은 타이어를 밤늦게까지 두드렸다고도 한다. 재일 한국인이라는 차별과 멸시 그리고 가난을 두드리면서 고시엔이라는 희망을 키우고 있었던것. 치열한 지역 예선을 통과 해야만이 본선에 오를수 있는 고시엔. 그래서 흙도 퍼가고 ( 어떤 투수가 마운드의 흙을 담는 모습이 티브이에 방송 되면서 부터 흙퍼가는 전통이 생겼다고하는데....암튼 ) 고시엔 본선 진출 자체가 영광이 되는것이다.

3학년 또 폭력 사건이 벌어 지는데.....

앞서 말한 폭력 사건이 다른 운동부의 군기를 잡기위한 줄빠따 사건이라면, 이 사건은 다르다. 야구부 선배가 야구부 후배를 때렸다는 것인데....자세히 알아보자, 그당시 일본에는 선생님들이 시내를 다니면서 학교를 안가고 돌아 다니는 학생들을 단속을 했다. 그런데 야구부원 3~4명이 연습 땡땡이를 치고 시내를 다니다가 단속하는 선생들한테 걸린것. 그래서 변명이랍시고 이것들이 한말이 "선배들이 때려서 안갔다" 바로 이게 문제가 된다.

일년전에 교내 모든 운동부가 출장 정지를 받았고 이제 막 출장 정지가 풀렸는데 2년 연속으로 폭력 사건이 벌어지자 기다리는 것은 또 출장정지. 바로 그때 등장하는 악역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모리모 토라는 야구부 담당 선생. 이 잣같은 사람이 한국 사람을 아주 싫어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놈이 아이디어라고 내놓은것이 있었으니... 바로 장훈 선수의 제명이다. 장훈 선수 혼자서 한짓이며 다른 일본인 학생들은 때리지 않았다고 장훈 선수 한명을 제명 시키면서 결국 나니와 상고의 출장정지를 막게되는것. 하지만 이사실을 알게된 하급생들이 선생을 찾아가 하리모토 선배는 때리지 않았다고 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제명은 진행된다.

훗날 장훈 선수는 야구부 담당 선생을 죽어도 용서할수 없다고 말할정도로, 노령의 나이임에도 분노를 참지 못하고 있다. 장훈 선수는 주전 선수였고 비주전인 3학년 학생들이 주로 군기를 잡았다는 것이다. 원래 실력이 모자라면 고학년이여도 후보신세를 면치 못한다. 그러면 싸이는 스트레쓰는 후배들 차지. 결국 고시엔을 위해, 고생하는 어머니를 위해 단식까지 하며 어려운 형편에 전학을 온 학교 였는데, 출장정지 뿐이 아니라 야구부에서 제명까지 당하게된다. 그리고 장훈 선수 없는 나니와 상고는 고시엔 지역 예선 조차 통과 하지 못한다.


장훈 선수를 탐내던 요미우리 자이언츠
그래도 2학년때부터 초고교급의 실력을 보인 장훈 선수임으로 프로팀에서 접촉이 없었던건 아니다. 이미 2학년때 당시요미우리 자이언츠의 水原茂(미즈하라) 감독으로부터 입단 제의를 받고 있었다. 미즈하라 감독은 학교를 중퇴하고 입단을 하라고 까지 얘기를 했다. 그러나 장훈 선수의 형님이 고등학교만은 나와라」고, 「프로야구 가서 성공 하면 되지만, 실패했을 경우, 고등학교도 못 나왔다고 하면 회사에 취직하기도 힘들다」 그래서 장훈 선수의 고등학교 졸업까지 자이언츠는 기다리겠다고 하면서 계약금 300만엔으로 입단 내정이 된 상태였다.

3학년 여름쯤에도 미즈하라 감독이 장훈 선수를 찾아온다. 그러면 제명이후 장훈 선수는 요미우리에 갔을까? 답은 아니다. 제명까지 당했으니 프로로 바로 가면 될것이지만, 자이언츠 구단에서 장훈 선수의 폭력 사건을 문제삼아 입단이 거절된다. 유망주이던 장훈 선수는 이제 야구도 할수 없게 되었고 고등학교 3학년이라는 시간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다.

야구부에서 완전히 제명된후, 야구를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장훈선수의 방황은 짐작이 간다. 장훈 선수는 만약 자신이 야구를 하지 못했다면 아마 야쿠자가 되었을 거라고 한다. 이를 뒷받침 하는 증거로서, 학교는 야쿠자가 많다는 오사카에서 다녔으며, 실제로 재일 한국인들에 대한 차별 때문에 취직이 어려워, 스포츠계, 연예계 그리고 야쿠자로 많이 진출 한것도 사실인데다가, 50년대말 181cm라는 큰 키와 체격 그리고 주먹을 갖춘 장훈 선수에게도 엄청난 야쿠자의 스카웃(?)제의가 있었다는 설도 설득력을 갖는다.

어떤 일본 사이트에 올라온 글에는 장훈 선수의 함께 야구를 했던 일본 친구가 실제로 야쿠자가 생활을 했던 모양인데, 장훈 선수는 싸움도 잘했지만 야구를 너무 좋아해서 야쿠자에 들어가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암튼 야구를 하기 위해 히로시마에서 오사카의 학교까지 갔지만, 야구를 할 수 없게된 장훈선수.그러나 그해 1958년 여름,어머니는 당시 고3의 장훈선수를 "재일교포 고등학생 선발 야구단(3회)"에 입단 시킨다. 야구를 하지 못해서 방황하는 아들을 위해 야구와 민족교육을 함께 할 수 있는 기회를 준것이다.

선수에게 1년은 그냥 1년이 아니다. 내가 다른 포스팅에서 박철순 선수의 재기를 높이 평가하는것도 이때문이며, 어린 선수가 훈련을 못하게 되었을때 망가지는 것은 하루아침이기 때문인데. 암튼 이당시 장훈 선수는 "재일교포 고등학생 선발 야구단"으로 난생 처음 한국을 방문하게 된다. 이 당시 장훈 선수는 처음으로 고국이란 어떤것인지 느꼈다고 한다. 그 전까지 어머니에게 말로만 들었던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는 것. 경기 결과도 뛰어나서 한국에서의 시합에서도 '연일 맹타를 휘둘렀다'고 하는데 당시 성적은 찾을 수 없었다.


고교 졸업후...

어느덧 시간이 흘러 고등학교 졸업을 하게된다. 그때 무려 9개의 구단이 장훈 선수를 스카웃하려고 하는데 장훈 선수와 어머니의 결정은 어떤 팀이 였을까? 그것은 바로 도에이 플라이어즈. 이전에는 쎄네이터스(1946) 그리고 플라이어즈 (1947-73)를 거쳐 현 니혼햄 파이터스까지 별로 두드러진 강팀도 아니였고 스타 플레이어도 없던 팀이였다. 그런데 왜 하필 이름도 이상한 도에이 플라이어즈 였을까?

도에이 플라이어즈 시절의 장훈 선수. 날씬한 모습으로 보아 입단 초기가 아니였을까 추측해봄

플라이어즈의 이와모도 감독이 직접 장훈 선수의 어머니가 계시던 히로시마 연립주택을 찾아와 무릎을 꿇고 앉아 "저에게 맡겨 주시면 꼭 장훈을 훌륭한 선수로 만들겠다" 라고 성의 있는 교섭태도를 보였다는것. 계약금이나 돈을 갖고 접근했던 구단들과는 그야말로 성의 있는 자세의 감독이였던것이다.

당시 야구전문 잡지는 장훈 선수의 도에이 입단에 대해 '도에이의 대홈런'이라고 특보 할 정도로 장훈 선수는 주목받던 신인이였다. 재미를 위해 하나더 말하자면, 장훈 선수가 허접한 도에이에 입단할 무렵, 고시엔의 스타가 되었던 왕정치는 최강팀인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한다.

프로선수 시절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포스팅으로....

Thursday, 11 August 2005

"불세출의 대타자" 장훈- 이야기 하나

장 훈(張 勳) 선수.....이야기의 시작...

철이 들어서야 장훈 선수의 위대함을 알았으니.....

장훈 선수에 대해 검색을 하면 주로 나오는것이 김장훈, 서장훈이다. 그래도 이것저것 찾아보다, 일본 웹 검색을 해보니 더 많은 자료에 놀랐었다. 사실 일본에서 활약을 했으니 당연한것이 겠지만...
장훈 선수의 위대함에 푸욱 빠져서 장훈 선수에 대한것들을 찾아보고 재미있어하고 ...암튼, 나에게도 이런 오타쿠 적인 면이 있었으니.... 정말 영화 같은,만화 같은 , 위인전 같은 그의 이야기를 시작하자.

장훈 선수는 1940년 6월 19일, 일본의 히로시마에서 태어났다. 경남 창녕에서 면서기를 지낸 장상정씨와 어머니 박순분 ( 박남전,朴南田 ) 씨의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6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며 더욱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내게된다. 일제시대에 면서기를 지낸 아버지라고 하면 친일파가 아니냐?라는 의문을 품도 사람도 있을것이다. 그러나 계속 읽으면서 스스로 판단 하길 바란다.


원폭투하
재일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받은 수많은 차별과 가난 외에도 장훈 선수는 더 많은 시련을 이겨내야 했는데, 그것은 바로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 폭탄 그리고 이듬해 입은 화상이다.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은 불과 장훈 선수의 집에서 3Km 정도밖에 안떨어져 있었으며. 5살이라는 어린나이로 피폭자가 되었는데, 이때의 사고로 장훈 선수는 큰누나를 잃게 된다. 너무 어린나이에 경험한 일이라 기억이 없다라고 말하는 장훈 선수의 인터뷰 내용처럼 아주 큰 첫번째 시련은 이어지는 시련을 무디게 했는지도 모른다.

같은해겨울, 후진하던 작은 트럭에 밀려서 손을 모닥불에 심하게 데이게 된다. 평생 한복을 입으셨다는 어머니가 어린 장훈을 안고 병원으로 뛰어갔을 때, 한국인임을 알아본 일본 의사가 응급치료를 거부하지만 않았어도, 손가락이 조금은 더 정상적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암튼 장훈 선수의 손은 어린시절 입은 화상으로 약지와 애지가 서로 붙어 있다고 한다. 지금까지도 그때입은 화상으로 손가락이 완전히 구부러지지도 펴지지도 않는다.

사람들 중에는 자신의 고생담과 핸디캡을 자랑하는 경우가 있다. 어려운 상황해서 잘 처리 했다며 알아 달라는 건데...농부가 어려운 조건에서 농사 지었다고 자랑하는거 본일 있는가? 하지만 첫마디 부터 "이거 안되는데...이거 힘들어요"는 들어본적이 많지 않은가. 그 일을 해야 하는 일이 직업이면서 말이다. (얘기가 자꾸 빠지는군...) 암튼 장훈 선수는 선수생활동안 자신의 핸디캡인 오른손을 자랑삼아 떠들지 않았다. 프로에서 장훈 선수의 손을 이상하게 여긴 타격코치가 펴보라고 했을때 마지못해 한번 보여준것이 전부라고 한다.


오른손 잡이에서 왼손 잡이로
장훈 선수는 원래 오른손 잡이었으나 어릴적 입은 화상으로 손가락이 자유롭게 구부러지지 않고 오른손으로는 송구가 어려워 왼손으로 야구를 시작한다. 어떤 자료에는 초등학교 4학년때부터 야구를 했다고 하나, 원래 수영부를 가려고 했던 장훈선수는 수영부가 없어 중학교 입학과 함께 야구부에 가입한다. 야구선수로는 조금은 늦은 출발이었고, 또한 화상 때문에 약해진 오른손의 악력을 극복하기위한 남다른 노력이 있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좋은 타격을 위해서는 여러 가지가 필요하지만 그중에서도, 좋은 그립이 필요하고 그와 동시에 강한 악력이 필요한데, 장훈 선수는 좌타자로서는 오른손가락이 완전히 구부러지지 않아 좋은 그립을 기대하기 힘든 조건이었다. 그러나 장훈 선수는 자신의 핸디캡을 극복해 나가는데, 그것은 끊임 없는 연습이었다.

그의 연습량은 아마에서 프로까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습에 몰입했다고 한다. 아마츄어 야구 유망주가 거의 그런거 처럼 장훈 선수도 고등학교때까지는 투수겸 4번 타자 였다. 투수를 못하게된 이유도, 고등학생 시절 연습을 마친 후에 선배가 찾아 오는 바람에 또다시 처음부터 연습을 시작해 하루 수백구를 전력 투구하다 어깨를 다친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는 후문이다.

기다하라 중학시절
중학교 재학 당시에도 유명한 장타자였다. 학교 운동장에서 연습을 하면 공이 반대편 교사 뒤를 넘어 철길까지 날아갔고 , 일부러 철길 주위에서 장훈 선수의 공을 줍는 볼보이가 필요할 정도였다고 한다.

기다하라 중학시절 학교 운동장에서 사소한 시비가 축부와 있었는데, '닥쳐라, 죠센진'이란 말에 장훈선수는 배트로 상대편 머리를 쳐버렸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한국인에다가 폭력 학생이라는 것까지 더해져 히로시마 내에서는 장훈 선수를 받아주는 학교가 없었다고 하는 기사가 있었는데 이부분은 사실이 아닌듯 싶다.

장훈 선수의 체격은 181Cm/85Kg, 그 옛날 이 체격이라면, 실로 먹어주는 체격이다. 우리나라도 아니고 일본에서라면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폭력사건은 항상 장훈 선수를 따라다녔다. 어쩌면 그런 폭력적 이미지는 프로에서 장훈 선수를 폄하 하려는 일본인들의 노력이었을 것이다. ( 프로에서 실제로 아주 커다란 사건도 있었고....나중에 더 자세하게 )야구연습중에 시비가 붙었으니 배트를 들고 있었을 것이고, 머리를 배트로 치는것이 그냥 툭 칠수는 있어도 세게 칠수는 없는것 아닌가?

고교 진학
장훈 선수가 처음으로 입학한 고등학교는 마쓰모토 상고. 그런데 바로 이학교가 어디인지가 중요하다.
웹검색으로 찾아보니 히로시마에서 더 멀리 떨어진 나고야의 마츠모토 고등학교가 있다.
여기는 이름만 같은 마츠모토 고교 일뿐.

그런데 마츠모토 고등학교에서 얼마 안떨어진 곳에 "조선학원"이 있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 마츠모토가 "그" 마츠모토인줄 알았는데... 그렇다면 오사카로 전학할때 돈( 하숙비용 등등 ) 이 없어서 힘이 들었다는 장훈 선수의 이야기로 미루어보아. 아마도 이 학교는 히로시마 내에 있었던 학교일것이다. 만약에 히로시마에 있는 또는 있었던 학교라면 장훈 선수를 히로시마에서 받아주는 학교가 없었다는건 사실이 아닌것이다.

확인!!! 마츠모토 상고는 히로시마에 있었으며 현재 세토우치 고등학교로 이름이 바뀐상태. 따라서 장훈 선를 받아주는 히로시마 내의 학교가 없다는것은 거짓

고교시절 장훈 선수의 꿈은 고시엔 대회 우승이었다. 고시엔 대회를 그냥 단순하게 우리와 비교 하자면 일본의 고시엔 예선 출전 팀 수는 약 4200개 우리는 예선 없이 본선 50 여개 -.- ......게다가 지금도 그런지 모르지만 4강만 오른팀은 나눠먹기식으로 쉬어가면서 출전하고...-.-

고시엔 대회에 나가려면 좋은 야구 팀이 있는 고등학교에 가고 싶은 생각이 컸을것이고, 히로시마의 고등학교들이 안받아 준것이 아니라 장훈 선수 스스로 좋은 팀에 가고 싶어 몰래 오사카에 있는 야구명문 나니와(浪華) 상고 (교명을 줄여서 '니미쇼(浪商)'로 불리는 간사이 지방의 야구 명문교로 선·후배와 동료 중에는 프로야구계에서 이름을 날린 명선수가 많다.) 까지 가서 시험을 쳤다. 시험에는 합격했지만, 그 다음에는 돈이 없어 니미쇼에 진학하지 못하고 마츠모토 상고에 진학 했다고 한다. 그러나 마츠모토 상고에 야구부가 있기는 한데 허접했던 모양이다 「이런 야구부로는 고시엔에 나갈수 없다」고 판단하고 집에서 단식투쟁을 한 끝에 한학기를 마치고 전학을 나니와 상고로 전학을한다.

『우리 가족이 돈이 어디 있어요. 내가 나와서 공부하고 있으니까 돈을 보내야지. 아버지 돌아가시고 하코방 같은 곳에서 어머니가 불고기를 팔고 우리 형이 택시운전을 하면서 돈을 벌었어요. 그게 한달에 2만3000엔 정도 벌어요. 그중에서 1만 엔을 저 에게 보내줘요. 그중에서 6000엔을 하숙비 로 내고 4000엔으로 제가 생활했어요. 4000엔으로 사실 생활하기가 힘들어요. 정말 어려운 생활이었어요. 』


1969년 한국 방문 - 장훈 선수와 어머니

고시엔은 명예 자체로의 의미도 있지만, 고시엔 스타는 졸업후 거액의 계약금으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하는 것이 이상적인 수순이다. 장훈 선수는 프로구단의 입단 계약금을 어머니에게 드리고 싶었다고 술회할 만큼 어린시절 부터 일찍 철이든 선수였다. 가난한 환경속에 고시엔은 오랜시간 기다려온 꿈이었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고교시절 단 한번도 고시엔을 밟지 못했다. 왜? 고시엔을 위해 야구명문으로 전학까지 갔던 장훈 선수...왜 고시엔에 출전하지 못한걸까? 예선탈락이라도 했단 말인가? 아니다 ... 이야기 둘에서 이어짐

Thursday, 7 July 2005

일본 프로야구 기록표

일본 프로야구 기록표

경기수(GP)득점(R)안타(H)
Career record:
3,017 -- Katsuya Nomura (1954-80)


#
Name
Games
1.
Katsuya Nomura
3,017
2.
Sadaharu Oh
2,831
3.
Isao Harimoto(장훈)
2,752
4.
Sachio Kinugasa
2,677
5.
Hironori Oshima
2,638
6.
Hiromitsu Kadota
2,571
7.
Masahiro Doi
2,449
8.
Yutaka Fukumoto
2,401
9.
Koji Yamamoto
2,284
10.
Morimichi Takagi
2,282
Career record:
1,967 -- Sadaharu Oh (1959-80)
Single-season record:
143 -- Makoto Kozuru (Shochiku Robins, 1950)


#
Name
Runs
1.
Sadaharu Oh
1,967
2.
Yutaka Fukumoto
1,656
3.
Isao Harimoto(장훈)
1,523
4.
Katsuya Nomura
1,509
5.
Sachio Kinugasa
1,372
6.
Koji Yamamoto
1,365
7.
Hiromitsu Ochiai
1,335
8.
Hiromitsu Kadota
1,319
9.
Shigeo Nagashima
1,270
10.
Isao Shibata
1,223
Career record:
3,085 -- Isao Harimoto (1959-81)
Single-season record:
210 -- Ichiro Suzuki (Orix BlueWave, 1994)


#
Name
Hits
1.
Isao Harimoto(장훈)
3,085
2.
Katsuya Nomura
2,901
3.
Sadaharu Oh
2,786
4.
Hiromitsu Kadota
2,566
5.
Sachio Kinugasa
2,543
5.
Yutaka Fukumoto
2,543
7.
Shigeo Nagashima
2,471
8.
Masahiro Doi
2,452
9.
Hiromitsu Ochiai
2,371
10.
Tetsuharu Kawakami
2,351
2루타(2R)3루타(3R)홈런(HR)
Career record:
449 -- Yutaka Fukumoto (1969-88)
Single-season record:
48 -- Phil Clark (Kintetsu Buffaloes, 1998)


#
Name
Doubles
1.
Yutaka Fukumoto
449
2.
Kazuhiro Yamauchi
448
3.
Sadaharu Oh
422
4.
Isao Harimoto(장훈)
420
5.
Shigeo Nagashima
418
6.
Kihachi Enomoto
409
7.
Tetsuharu Kawakami
408
8.
Makoto Matsubara
405
9.
Katsuya Nomura
397
10.
Yoshinori Hirose
394
Career record:
115 -- Yutaka Fukumoto (1969-88)
Single-season record:
18 -- Masayasu Kaneda (Osaka Tigers, 1951)


#
Name
Triples
1.
Yutaka Fukumoto
115
2.
Shoichi Busujima
106
3.
Masayasu Kaneda
103
4.
Tetsuharu Kawakami
99
5.
Yoshinori Hirose
88
6.
Shosei Go
81
6.
Toshio Naka
81
8.
Shigeo Nagashima
74
9.
Isao Harimoto(장훈)
72
10.
Yoshio Yoshida
70
Career record:
868 -- Sadaharu Oh (1959-80)
Single-season record:
55 -- Sadaharu Oh (Yomiuri Giants, 1964)


#
Name
HRs
1.
Sadaharu Oh
868
2.
Katsuya Nomura
657
3.
Hiromitsu Kadota
567
4.
Koji Yamamoto
536
5.
Hiromitsu Ochiai
510
6.
Isao Harimoto(장훈)
504
6.
Sachio Kinugasa
504
8.
Katsuo Osugi
486
9.
Koichi Tabuchi
474
10.
Masahiro Doi
465
타점(RBI)4구(BB)타율(AVG)
Career record:
2,170 -- Sadaharu Oh (1959-80)
Single-season record:
161 -- Makoto Kozuru (Shochiku Robins, 1950)


#
Name
RBIs
1.
Sadaharu Oh
2,170
2.
Katsuya Nomura
1,988
3.
Hiromitsu Kadota
1,678
4.
Isao Harimoto(장훈)
1,676
5.
Hiromitsu Ochiai
1,564
6.
Shigeo Nagashima
1,522
7.
Katsuo Osugi
1,507
8.
Koji Yamamoto
1,475
9.
Sachio Kinugasa
1,448
10.
Masahiro Doi
1,400
Career record:
2,390 -- Sadaharu Oh (1959-80)
Single-season record:
158 -- Sadaharu Oh (Yomiuri Giants, 1974)


#
Name
Bases on Balls
1.
Sadaharu Oh
2,504
2.
Hiromitsu Ochiai
1,538
3.
Katsuya Nomura
1,374
4.
Isao Harimoto(장훈)
1,352
5.
Hiromitsu Kadota
1,335
6.
Yutaka Fukumoto
1,277
7.
Kazuhiro Kiyohara
1,237
8.
Koji Yamamoto
1,230
9.
Kihachi Enomoto
1,152
10.
Sachio Kinugasa
1,092
(At least 4,000 at-bats)Career Record:
.320 -- Leron Lee (1977-1987)
Single-season record:
.389 -- Randy Bass (Hanshin Tigers, 1986)


#
Name
AB
H
AVE
1.
Leron Lee
4,934
1,579
.320
2.
Tsutomu Wakamatsu
6,808
2,173
.319
3.
Isao Harimoto(장훈)
9,666
3,085
.319
4.
Greg "Boomer" Wells
4,551
1,413
.317
5.
Tetsuharu Kawakami
7,500
2,351
.313
6.
Kaname Yonamine
4,298
1,337
.311
7.
Hiromitsu Ochiai
7,627
2,371
.310
8.
Leon Lee
4,667
1,436
.308
9.
Futoshi Nakanishi
4,116
1,262
.307
10.
Shigeo Nagashima
8,094
2,471
.305

삼진(K)

死구(HBP)
Remarks


Career record:
1,587 -- Sachio Kinugasa (1965-87)
Single-season record:
204 -- Ralph Bryant (Kintetsu Buffaloes, 1993)

#
Name
Strikeouts
1.
Sachio Kinugasa
1,587
2.
Koji Akiyama
1,561
3.
Hiromitsu Kadota
1,520
4.
Katsuya Nomura
1,478
5.
Yasunori Oshima
1,462
6.
Katsumi Hirosawa
1,393
7.
Kazuhiro Kiyohara
1,385
8.
Takahiro Ikeyama
1,348
9.
Sadaharu Oh
1,319
10.
Masaru Uno
1,306
Career record:
163 -- Masashi Takenouchi (1968-82)
Single-season record:
24 -- Yoshiyuki Iwamoto (Taiyo Whales, 1952)



#
Name
HBP
1.
Masashi Takenouchi
166
2.
Sachio Kinugasa
161
3.
Hiroaki Inoue
137
4.
Kazuhiro Kiyohara
136
5.
Koichi Tabuchi
128
6.
Katsuya Nomura
122
7.
Toshio Kato
116
8.
Sadaharu Oh
114
9.
Kenjiro Tamiya
104
10.
Shigeru Kurihasi
96
통산 3085안타 504홈런 319 도루
타율 .319 통산10걸중 최다타수 최다안타
통산 3루타 72개로 빠른발과 공격적인 베이스런닝 증명(도루 319 역대 20위)
통산 홈런 504개 장타력 증명
타점 1676, 당시 하위팀이던 도에이 플라이어스에서 17시즌의 선수생활을 감안해야함
통산삼진 815개밖에 당하지 않음,
몸에 맞은공은 78개로 10위안에 포함되지 않음 정확한 기록을 작성하기 전에는 몸에 맞은공이 많을거라고 짐작했다. 그러나 의외로 스스로 그라운드에서 자신을 보호했던 장훈 선수의 어필덕분인지 10위 안에는 들지 않는다.
※기록경신가능성을 참고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