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한, 장훈 선수는 투수가 빈볼을 던지면 아주 강하게 어필했다. 이것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함이였으나 이런 모습이 폭력적인 이미지가 더해지는데 한몫했다고도 볼수있다. 그러나 실제로 일본에 진출한 한국인 타자들 이종범( 공에 맞아 오른쪽 팔꿈치 부상), 이승엽 ( 몸에 맞는공과 위협구 때문에 첫해 고전 ) 등이 투수들의 빈볼성 공에 고전했다. 만약 장훈 선수 같이 강하게 어필 했다면 아마도 투수들이 더 고전했을지도 모를일이다.
장훈 선수는 강한 어필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단한번도 먼저 때리거나, 심판에게 퇴장명령을 받은 적은 없다는 것이다. 빈볼에 때문에 투수를 때린적도 있지만 먼저 때린것이 아니며 , 심판이 '이젠 그만해'라고 하면 바로 그만했다는 것이다. 화가 나지만 참을 때 참았다는 것인데 어디 그게 쉬운일인가 말이다.
장훈 선수와 왕정치 선수
일본 사람들이 장훈 선수를 폄하할때 곧잘 왕정치 선수와 비교 한다. 장훈 선수와 왕정치 모두 일본인이 아니지만 왕정치는 신사적이 라는 것이다. 그러나 왕정치는 귀화를 했다. 일본은 사회적으로 귀화한 사람들에게 대해서는 공격적이지 않는다. 또 요미우리가 어떤 회사인가? 언론 재벌아닌가, 따라서 왕정치 선수에게 비신사적인 행동을 한 선수는 바로 그다음날 비겁한 선수로 낙인이 찍히게 된다. 정면 승부를 하지 않은 투수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장훈 선수는 귀화도 하지 않았고 소속팀의 방패도 없었다 다만 기자들에게 폭력적인 이미지가 추가되어 아주 좋은 '기사감 이 였던 것이다.
히로시마 폭력 사태
1976년, 자이언츠의 히로시마 원정경기때, 폭력사태가 벌어진다. 9회 초, 1점차로 뒤진 자이언츠의 마지막 공격, 2루에 있던 주자가 안타때 홈에 들어오다가 아웃이 된다. 이때의 판정시비로 감독이 항의하러 나가는데, 갑자기 관중이 한사람이 그라운드로 내려와서 방망이를 가지고 감독을 때리러간다. 이것을본 벤치에 있던 자이언츠 선수들이 나가게되고,폭력사태가 벌어지는데 문제는 그이후에 벌어진다
경기가 끝나고 나가서, 버스를 타려는 자이언츠 선수들에게 200~300명 정도의 관중이 달려든다. 서둘러 버스에 오르는 장훈 서누를 잡고 늘어지던 시민을 발로 차고 장훈 선수는 버스 계단을 오르지만 또 달려드는 관중을 배트로 후배 선수가 팍 친다 ( 찌르듯이 쳤을것 ). 배트에 머리를 맞은 관중은 피를 흘리며 「하리모토에게 얻어맞았다」고 소리를 지른다. 그 다음날 장훈 선수는 누명을 쓰게 되고 신문의 머리기사를 장식하게 되는데, 급기야 장훈 선수의 어머니 댁에는 돌까지 날아든다.
장훈 선수에게 인삼-닭고기 ( 인삼과 닭고기인지 삼계탕인지 모르겠음 )를 주려고 구장에 와있던 어머니와 형님은 그 상황을 옆에서 보고 있었던것. 어머니는 「왜 사실을 밝히지 않느냐」. 「네가 하지 않았다는데, 형이 옆에서 봤다는데, 후배가 했다고 하면 될 거 아니냐」하셨으나, 장훈 선수는「엄마, 나를 도 와주려고, 내가 맞으려고 하는 것을 막아주 려고 후배가 중간에 들어와서 내대신 한 일인데, 어떻게 제가 말을 하겠습니까. 기다려 주세요. 꼭 진실은 나중에 알려질 테니까」라고 말하고 경찰 조사에 응한다.
조사중에도 사실은 후배가 배트로 시민의 머리를 쳤다고 했으면 쉽게 끝날일이였으나 장훈 선수는 계속 「안했다」고만 했다고 한다. 이 조사는 한달 넘게 끌면서 순사-경사-경시정(? 꽤 높은 직책인가봄 )과도 대면을 하게 되는데 이때 장훈 선수는 「진실은 하나다」라고만 말하자 잠시후 모든 수사 의뢰를 기각 시켰다나. (장훈 선수도 멋지지만 경시정인가 하는 사람도 꽤 멋진 사람인다) 암튼 그렇게 시간이 흘러 또 한달가량 시간이 지났을 무렵 후배가 시민을 배트로 때리는 사진 공개 되면서 매스컴에 진실이 밝혀진다.
이부분은 상당히 언론의 암묵적 동의가 있었던것 같다. 증거 사진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 기자인지 시민인지는 모르지만 시민들이 몸싸움 하는 과정에 버스 앞까지 가서 사진을 찍을 시민이 있을까?라고 생각하면 위에서 설명한 '기사감'은 상당히 설득력을 갖는다. 증거 사진을 히로시마폭력사건 이후 무려 두달이 지나서야 발표한 것인데. 뒤늦게 특종을 노리던 기자의 욕심이였을까? 아니면 장훈 선수를 끝까지 폭력적 이미지의 선수로 남게하려 했던 것일까?
그런데, 특이한점은 이 사건 발발 직후 기자들이 찾아간 곳이 있었으니 거기는 다름아닌 히로시마의 우리 민단 ( 재 일본대한민국 거류민단 )이다. ( 사실 이부분에 대해 뭐라 논하기는 난감했지만 그냥 내 블로그니 내맘대로 쓰련다.) 이상하지 않은가? 재일 한국인이였지만 일본에서 태어났으며 외국인 선수 규정까지 바꾸면서 뛰게된 선수가 장훈 선수다. 박찬호 선수가 이단 옆차기 했을때 한국 대사관 와서 인터뷰 하는 기자가 있었나? 이것은 폭력사건을 장훈 선수 개인의 일에서 재일 한국인 전체의 일로 확대 하려는 일본 언론의 의도 이외에 무엇이 있나 말이다. 작은 사건을 국가적인 이미지로확대 하려는음모. 이런것이 일본 넘들이 주로 하는 수작인데.....씁쓸하다.
히로시마 펜들에게 사과를 받다.
결국 진범이 밝혀진뒤, 또 히로시마 구장 경기중. 관중석에서 좌익수를 보던 장훈 선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처음에는 야유소리라고 생각하고 뒤를 보지 않던 장훈 선수는 계속되는 「하리모토!」소리에 뒤를 돌아본다. 몇몇 사람이 머리를 박박 깎고 무릎을 꿇고 앉아. 잘못했다고, 자기들이 오해했다며 사과를 한것. 장훈선수도 15세까지는 히로시마에서 태어나서 살았으니 히로시마 사람이나 다름없었던것. 하지만 유독 76년 히로시마를 상대로 맹타를 휘두르던 장훈 선수를 곱지 않은 눈으로 보는 히로시마 펜들이 많았다니 이또한 재미있는 점이다.
1976년, 빼앗긴 타격왕?
1976년은 요미우리 이적 첫해이다. 그런데 기록을 보면 의문점이 생긴다. 130경기에 출전해서 리그 최다 182 안타를 쳤다. 타율 .355 그러나 타격왕은 장훈이 아니였다. 최다안타가 최고 타율까지이 되란 법은 없지만.....의문이 생긴다
시즌 막판까지, 장훈 선수는 주니치의 야자와 겐이치(谷澤健一)와는 모(毛) , 할,푼,리,모 10000분의 일까지 겨루는 치열한 타격경쟁을 벌이고 있었다고 한다. 자이언츠의 리그 마지막 경기는 나고야에서 홈팀 주니치를 상대하게 된다. 장훈 선수의 강습타구는 필사적으로 슬라이딩한 유격수의 글러브 끝을 스치고, 2루 베이스와 유격수 사이를 꿰뚫었다. 그러나 잠시후, 전광판에는 '실책'으로 기록이 되자,자이언츠의 코칭스태프와 주력선수들이 일제히 뛰쳐나와 기록원석을 향해 항의를 하고 기자석에서는 격렬한 야유가 터졌으나 판정이 번복되진 안았다고 한다.
당연한 안타를 실책으로 기록하는 히로시마
강습 타구의 경우는 기록이 안타로 나는게 정상이다. 만약에 야수 정면으로 향하는 강한 타구를 잡지 못했다면 실책으로 기록되는것이 당연하지만 슬라이딩 캐치를 실패 했다 하더라도 실책으로 기록되지는 않는다. 다만 슬라이딩 캐치후에 송구 동작에서 일어난 실수라면 실책이겠지만 쪽발이들의 치졸함이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미 얼마 전 다른 경기에서도 이와 비슷한 불리한 판정을 받은 일이 있는 장훈 선수의 분노는 자못 컸다. 더우기 1루 베이스 위의 주자 장훈 옆에 서 있는 주니치 1루수가 얄궂게도 바로 경쟁상대인 야자와였다. 그래도 장훈은 그 시점에서 타율이 약간 앞서 있었지만 다음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야자와가 3타수 3안타를 치면 1모 차로 역전될 형세였다. 그런데 만약 장훈 선수의 이번 타구가 안타로 기록되었으면 야자와는 다음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5타수 5안타를 쳐야 이기는 상황이였으니 음모 말고는 다른말로 뭐라 하겠나. 역시 일본 넘들은 치사하고 야비한데...주도면밀까지 했으니....
야자의 소속팀인 주니치의 다음 경기는 시즌 마지막 경기로 대 히로시마 원정 경기. 히로시마의 재일동포 투수 가네시로 모도야스(金城基泰)는 마치 '쳐 주십시오' 하듯이 야자와에게 스피드를 죽인 직구를 한가운데로만 던지고 내야수는 타구를 끝까지 쫓아가지 않는 따위의 낯뜨거운 더티플레이로 기어이 3안타를 만들어 주어 수위타자 타이틀은 야자와에게 돌아갔다.역시 일본인들의 주도 면밀함은.... 한국인을 이용한 한국인 죽이기랄까? 언제나 앞잡이를 내세우는 이런 비열함에 또 고스란히 이용당하는 앞잡이들.
이 앞잡이 사진 우선 공개-짠물-삼미수퍼스타즈 홈페이지에서 퍼옴
이런 얼굴인 남자들은 만나지 않는것이 좋을듯-기분 나쁘니까 자주 보지도 말것
나중에 짧게라도 이 선수에 대한 글을 쓸것임, 왜냐면 또 꾸물꾸물 우리나라로 와서 선수생활을 2년 동안이나 했으니까
정정 당당한 승부였다면 누가 무어라 하겠냐만은 너무나도 일본 프로야구사에 부끄러운 기록으로 남을것이다. 잘해도 너무 잘한 장훈 선수 탓을 할수는 없지 않은가. 타격왕이라는 자리를 무려 7번이나 차지한 이후 만약 장훈 선수가 또 수위타자 자리에 올라간다면 일본 프로야구 역사상 양대리그 타격왕이 탄생하는 중요한 순간이였던 것이다. 장훈 선수는 이 판정만은 지금껏 체념을 못하고 있다고 하는데 ...암튼 타율이나 알아보자....
야자와의 타율이. 3548, 장훈 선수가 . 3547 ...........
결과는 장훈 선수의 1모차의 패배였지만 일본 프로야구사를 더럽힌 타율 조작이였던 것이다.
다음은 장훈 선수의 이어지는 활약상과 역도산과의 내용이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