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27 August 2005

"불세출의 대타자" 장훈- 이야기 셋

드디어 프로 야구 선수의 시작1959년 고졸 신인으로 도에이에 입단한 장훈 선수는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아마야구 선수에서 드디어 프로야구 선수로서 59년 시즌 첫 경기에 출전 한다. 포지션은 좌익수 그리고 타순은 6번. 그러나 프로 데뷔 첫 타석에서 장훈 선수는 3구 3진을 당한다. 그냥 3진도 아니고 3구 삼진..... 그리고 수비때에는 실책까지 범하면서 호된 신고식을 치루면서 교체되어 벤치에서 남은 경기를 지켜본다.

그리고 숙소로 돌아온 장훈 선수는 밤새도록 스윙연습을 하면서 타격감을 찾으려고 노력을 하고 바로 다음날 경기 첫 타석에서 2루타 , 그 다음 타석에서 홈런을 치며 본격 궤도에 오른다. 6번타자에서 5번 타자를 거치면서 데뷔 첫해 6월 하순부터 4번 타자가 된다 . 일명「19세의 4번 타자」로 신화같은 기록을 남기며, 첫 해 125경기에 출전, 2할7푼5리, 13홈런 57타점으로 신인왕이 됐고, 두 번째 해에 3할을 넘기게 된다. 신인왕 선정에 대해 장선수는 3할 미만의 타율과 한국인이라는 점 때문에 염려 했다고 하지만 기자단 투표에서 141표중 111표를 얻어 압도적인 표차로 신인왕에 선정됐다.

어쩌면 .275가 낮은 타율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일본 프로 진출을 선언한 아시아 홈런왕 이승엽의 첫해 목표가 .29이라는점을 감안 한다면 고졸신인으로는 결코 낮은 타율이 아니다. 또 어쩌면 다른 선수들이 못했기 때문에 신인왕에 뽑혔을거라고 폄하하려는 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 프로야구는 신인왕을 의무적으로 뽑지는 않았다. 59년 장훈 선수를 신인왕으로 뽑았던 퍼시픽 리그는 이듬해 '대상자 없음'을 선언했고, 이후에도 5차례나 더 신인왕을 뽑지 않았다. 가장 최근으로는 2000년에 대상자가 없었다. 센트럴리그도 63년부터 75년까지 4차례나 신인왕을 배출하지 않았을 정도로, 일본 프로 야구는 해당자가 없는 해에는 신인왕을 뽑지 않음으로서 신인왕 타이틀에 대한 권위를 지켜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함께 입단 했던 왕정치는 어땠을까? 고시엔의 스타로 요미우리에 입단한 왕정치(王貞治-오 사다하루).그는 계약금 1800만 엔의 ( 11만 엔의 월급) 이었고 장훈 선수는 계약금 200만 엔, ( 월급 4만5000엔) 이였다. 장훈 선수에 비해 엄청난 금액. 아마도 장훈 선수가 고시엔에 출전했더라면 하는 생각도 해보지만. 암튼 왕정치는 무려 27 타석째에 첫 안타를 치고 첫 해 타율도 1할6푼1리였다. 왕정치 선수를 폄하하려는것이 아니다. 그는 홈런 타자로 키워졌던 것이다. 강팀중에 강팀이던 요미우리로서는 평범한 타자보다는 간판 홈런 타자를 원했던 것이고 계속 큰스윙만을 하도록 왕정치를 훈련시킨 것. 간혹 왕정치와 장훈 선수를 놓고 장훈 선수는 홈런을 많이 치지 못했다고 하는 말을 하는데 홈런 기록만 미리 밝히자면 장훈선수의 통산 홈런은 무려 504개로 역대 일본 프로야구 홈런부분 6위를 기록 하고 있다.

귀화 국적을 바꾸지 말고 구단을 바꿔라

장훈 선수에 대한 이야기를 할때 빠지지 않는것이 귀화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귀화를 하건 안하건 그게 중요진 않다. 특히 일본에서는 말이다. 차별이고 뭐고를 떠나서 한가지 예만 들어보자면, 프로야구 선수들의 해외 전지 훈련때 한국인이던 장훈 선수는 항상 한국을 경유해서 훈련지에 도착했었다고 한다. 물론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당시로서 귀화는 아주 현실적인 문제였다. 그런데 어느날 장훈 선수에게 구단주 오오카와(大川) 가 계약금 인상과 함께 귀화를 권유한다. 형식은 자신의 양자로 해도 좋다고 말할정도로 아주 파격적!!!. 구단주의 생각은 장훈 선수가 외국인으로 되어있어서 외국인 선수 보유 3명중 한명을 차지하는 장훈 선수를 귀화 시킴으로서 팀전력의 상승을 기대했던것이다.

어머니와 가족들에게 이문제를 이야기하자 장훈 선수의 어머니의 말씀은 한마디로 "안된다" 였고 국적을 바꾸느니 구단을 바꾸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이이야기를 전해들은 구단주는 ' 아, 정말 훌륭한 어머니를 두었다"라고 한후 장훈 선수 한명을 위해서 프로야구의 외국인 규약 자체를 바꿔준다. 오오카와 오너는 퍼시픽 리그의 의장을 맡고 있었음으로 끝발이 좀 있었나부다. 암튼 「1945년까지 일본에서 태어난 선수는 일본인과 똑같은 규약이 적용되는 것으로 본다」 이렇게 바꾸면 적어도 외국인 규약에서는 장훈 선수도 일본인과 똑같은 대우를 받으니, 한국 국적을 버리지 않아도 팀은 3명의 외국인 선수를 확보할 수 있었다.


연습
프로 생활동안 줄곧 3할을 유지했더너 장훈 선수의 비결은 무엇이였을까? 비결은 역시 장훈 선수의 끊임없는 노력이었다. 도에이 시절 베팅 케이지에 한번 들어갔다 하면, 본인이 싫증을 느낄 때까지 타격연습을 한 뒤에야 다음 선수와 교대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러고도 모자라 밤에는 손바닥 굳은살이 헤져서 배트 손잡이가 피로 물들고, 스텝한 앞발로 인해 여관방 돗자리가 헤질 때까지 연습으로 지샌 밤이 수없이 많았다.

화상을 입어 붙어 버린 오른손 때문에 오른손의 악력이 많이 부족했던 장훈 선수는 타격코치 마쓰키 겐지로(松木謙治郞) 의 지시대로 오른손 한손으로만 하루에 500개 배팅을 1년 정도 한다. 프로야구 시즌이 개막중일때도, 또 끝났을 때도 쉬지 않았으며. 경기가 있을 때는 경기 시작 전에 하기도 하고 경기를 마치고 하기도 하고 매일같이 하루에 한손으로만 500개의 스윙이 아닌 배팅을 소화하면서 강타자의 면모를 더욱 다듬어 간다.


4번 타자가 도루 41개
1959년 입단해서 신인왕으로 출발한 장훈 선수는
60년 베스트 9, 61년 타격왕과 베스트 나인 62년에는 출루율 1위, 타격왕 베스트 나인 그리고 MVP까지 거머쥐면서 재팬 시리즈 우승으로 팀을 이끈다.


1963년 장훈 선수는 무려 41개의 도루를 기록한다. 타격 못지 않게 발도 빨라 그야말로 '호타준족' 또한 다음해에는 볼넷도 92개. 선구 안도 좋았던 장훈 선수는 볼넷을 많이 골라 내면서 상대 투수를 괴롭히면서 자신의 타율을 유지하는 비결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또하나의 비결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광각타법'이라는 장훈 선수만의 비밀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