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20 August 2005

"불세출의 대타자" 장훈- 이야기 둘

자 이제 장훈 선수의 고교시절을 알아보자. 앞서서 말했듯이 고시엔에 대한 큰 꿈을 안고 단식투쟁으로 전학까지 갔던 장훈선수.


폭력훈련
장훈 선수가 나니와 상고 일학년때, 학교는 '폭력훈련' 사건에 휘말리게된다. 우리나라는 지금도 그렇지만 예체능 계열의 학교에서 군기를 명목으로 줄빠따가 있는데, 바로 이런 사건이 50년대 중반 일본에서도 있었고 또 그당시에도 물의를 일으켰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사건은 야구부가 아닌 다른 체육부에서 있었던 일이 였는데, 나니와 상고 전체가 일년간 출장 정지 처분을 받게된다. 그렇게 2학년 말까지 장훈선수는 시합출전을 하지 못하고 훈련에만 매진 한다.

드디어 2학년 말에 출장 정지가 풀리면서 근처 학교와 두달간 13 게임을 치루는데, 성적은 타율 5할6푼, 홈런 11개. 그중 홈런 하나는 정전 홈런으로 유명하다. 장훈 선수의 홈런 볼이 전신주를 맞췄는데, 그지역에 정전사태가 벌어진것. 이런 만화 같은 사건이 실제로 장훈 선수에게 있었다. 그리고
장훈 선수의 이야기를 그린 만화가 허영만씨의 "질수없다" 표지, 만화로선 드문 논픽션 만화 그러나 읽다보면 정말 '만화'같은 장훈 선수의 이야기

이제 출장 정지도 풀려서 장훈 선수는 그야 말로 피나는 연습으로 하루하루를 보낸다. 학교에서 연습을 마치면 선배들이 먹을 것을 사줬다고 한다. 뭐 도너츠 같은 거라고 하는데 암튼 배를 채우고 곧바로 강변에 묶어놓은 타이어를 밤늦게까지 두드렸다고도 한다. 재일 한국인이라는 차별과 멸시 그리고 가난을 두드리면서 고시엔이라는 희망을 키우고 있었던것. 치열한 지역 예선을 통과 해야만이 본선에 오를수 있는 고시엔. 그래서 흙도 퍼가고 ( 어떤 투수가 마운드의 흙을 담는 모습이 티브이에 방송 되면서 부터 흙퍼가는 전통이 생겼다고하는데....암튼 ) 고시엔 본선 진출 자체가 영광이 되는것이다.

3학년 또 폭력 사건이 벌어 지는데.....

앞서 말한 폭력 사건이 다른 운동부의 군기를 잡기위한 줄빠따 사건이라면, 이 사건은 다르다. 야구부 선배가 야구부 후배를 때렸다는 것인데....자세히 알아보자, 그당시 일본에는 선생님들이 시내를 다니면서 학교를 안가고 돌아 다니는 학생들을 단속을 했다. 그런데 야구부원 3~4명이 연습 땡땡이를 치고 시내를 다니다가 단속하는 선생들한테 걸린것. 그래서 변명이랍시고 이것들이 한말이 "선배들이 때려서 안갔다" 바로 이게 문제가 된다.

일년전에 교내 모든 운동부가 출장 정지를 받았고 이제 막 출장 정지가 풀렸는데 2년 연속으로 폭력 사건이 벌어지자 기다리는 것은 또 출장정지. 바로 그때 등장하는 악역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모리모 토라는 야구부 담당 선생. 이 잣같은 사람이 한국 사람을 아주 싫어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놈이 아이디어라고 내놓은것이 있었으니... 바로 장훈 선수의 제명이다. 장훈 선수 혼자서 한짓이며 다른 일본인 학생들은 때리지 않았다고 장훈 선수 한명을 제명 시키면서 결국 나니와 상고의 출장정지를 막게되는것. 하지만 이사실을 알게된 하급생들이 선생을 찾아가 하리모토 선배는 때리지 않았다고 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제명은 진행된다.

훗날 장훈 선수는 야구부 담당 선생을 죽어도 용서할수 없다고 말할정도로, 노령의 나이임에도 분노를 참지 못하고 있다. 장훈 선수는 주전 선수였고 비주전인 3학년 학생들이 주로 군기를 잡았다는 것이다. 원래 실력이 모자라면 고학년이여도 후보신세를 면치 못한다. 그러면 싸이는 스트레쓰는 후배들 차지. 결국 고시엔을 위해, 고생하는 어머니를 위해 단식까지 하며 어려운 형편에 전학을 온 학교 였는데, 출장정지 뿐이 아니라 야구부에서 제명까지 당하게된다. 그리고 장훈 선수 없는 나니와 상고는 고시엔 지역 예선 조차 통과 하지 못한다.


장훈 선수를 탐내던 요미우리 자이언츠
그래도 2학년때부터 초고교급의 실력을 보인 장훈 선수임으로 프로팀에서 접촉이 없었던건 아니다. 이미 2학년때 당시요미우리 자이언츠의 水原茂(미즈하라) 감독으로부터 입단 제의를 받고 있었다. 미즈하라 감독은 학교를 중퇴하고 입단을 하라고 까지 얘기를 했다. 그러나 장훈 선수의 형님이 고등학교만은 나와라」고, 「프로야구 가서 성공 하면 되지만, 실패했을 경우, 고등학교도 못 나왔다고 하면 회사에 취직하기도 힘들다」 그래서 장훈 선수의 고등학교 졸업까지 자이언츠는 기다리겠다고 하면서 계약금 300만엔으로 입단 내정이 된 상태였다.

3학년 여름쯤에도 미즈하라 감독이 장훈 선수를 찾아온다. 그러면 제명이후 장훈 선수는 요미우리에 갔을까? 답은 아니다. 제명까지 당했으니 프로로 바로 가면 될것이지만, 자이언츠 구단에서 장훈 선수의 폭력 사건을 문제삼아 입단이 거절된다. 유망주이던 장훈 선수는 이제 야구도 할수 없게 되었고 고등학교 3학년이라는 시간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다.

야구부에서 완전히 제명된후, 야구를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장훈선수의 방황은 짐작이 간다. 장훈 선수는 만약 자신이 야구를 하지 못했다면 아마 야쿠자가 되었을 거라고 한다. 이를 뒷받침 하는 증거로서, 학교는 야쿠자가 많다는 오사카에서 다녔으며, 실제로 재일 한국인들에 대한 차별 때문에 취직이 어려워, 스포츠계, 연예계 그리고 야쿠자로 많이 진출 한것도 사실인데다가, 50년대말 181cm라는 큰 키와 체격 그리고 주먹을 갖춘 장훈 선수에게도 엄청난 야쿠자의 스카웃(?)제의가 있었다는 설도 설득력을 갖는다.

어떤 일본 사이트에 올라온 글에는 장훈 선수의 함께 야구를 했던 일본 친구가 실제로 야쿠자가 생활을 했던 모양인데, 장훈 선수는 싸움도 잘했지만 야구를 너무 좋아해서 야쿠자에 들어가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암튼 야구를 하기 위해 히로시마에서 오사카의 학교까지 갔지만, 야구를 할 수 없게된 장훈선수.그러나 그해 1958년 여름,어머니는 당시 고3의 장훈선수를 "재일교포 고등학생 선발 야구단(3회)"에 입단 시킨다. 야구를 하지 못해서 방황하는 아들을 위해 야구와 민족교육을 함께 할 수 있는 기회를 준것이다.

선수에게 1년은 그냥 1년이 아니다. 내가 다른 포스팅에서 박철순 선수의 재기를 높이 평가하는것도 이때문이며, 어린 선수가 훈련을 못하게 되었을때 망가지는 것은 하루아침이기 때문인데. 암튼 이당시 장훈 선수는 "재일교포 고등학생 선발 야구단"으로 난생 처음 한국을 방문하게 된다. 이 당시 장훈 선수는 처음으로 고국이란 어떤것인지 느꼈다고 한다. 그 전까지 어머니에게 말로만 들었던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는 것. 경기 결과도 뛰어나서 한국에서의 시합에서도 '연일 맹타를 휘둘렀다'고 하는데 당시 성적은 찾을 수 없었다.


고교 졸업후...

어느덧 시간이 흘러 고등학교 졸업을 하게된다. 그때 무려 9개의 구단이 장훈 선수를 스카웃하려고 하는데 장훈 선수와 어머니의 결정은 어떤 팀이 였을까? 그것은 바로 도에이 플라이어즈. 이전에는 쎄네이터스(1946) 그리고 플라이어즈 (1947-73)를 거쳐 현 니혼햄 파이터스까지 별로 두드러진 강팀도 아니였고 스타 플레이어도 없던 팀이였다. 그런데 왜 하필 이름도 이상한 도에이 플라이어즈 였을까?

도에이 플라이어즈 시절의 장훈 선수. 날씬한 모습으로 보아 입단 초기가 아니였을까 추측해봄

플라이어즈의 이와모도 감독이 직접 장훈 선수의 어머니가 계시던 히로시마 연립주택을 찾아와 무릎을 꿇고 앉아 "저에게 맡겨 주시면 꼭 장훈을 훌륭한 선수로 만들겠다" 라고 성의 있는 교섭태도를 보였다는것. 계약금이나 돈을 갖고 접근했던 구단들과는 그야말로 성의 있는 자세의 감독이였던것이다.

당시 야구전문 잡지는 장훈 선수의 도에이 입단에 대해 '도에이의 대홈런'이라고 특보 할 정도로 장훈 선수는 주목받던 신인이였다. 재미를 위해 하나더 말하자면, 장훈 선수가 허접한 도에이에 입단할 무렵, 고시엔의 스타가 되었던 왕정치는 최강팀인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한다.

프로선수 시절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포스팅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