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이 들어서야 장훈 선수의 위대함을 알았으니.....
장훈 선수에 대해 검색을 하면 주로 나오는것이 김장훈, 서장훈이다. 그래도 이것저것 찾아보다, 일본 웹 검색을 해보니 더 많은 자료에 놀랐었다. 사실 일본에서 활약을 했으니 당연한것이 겠지만...
장훈 선수의 위대함에 푸욱 빠져서 장훈 선수에 대한것들을 찾아보고 재미있어하고 ...암튼, 나에게도 이런 오타쿠 적인 면이 있었으니.... 정말 영화 같은,만화 같은 , 위인전 같은 그의 이야기를 시작하자.
장훈 선수는 1940년 6월 19일, 일본의 히로시마에서 태어났다. 경남 창녕에서 면서기를 지낸 장상정씨와 어머니 박순분 ( 박남전,朴南田 ) 씨의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6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며 더욱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내게된다. 일제시대에 면서기를 지낸 아버지라고 하면 친일파가 아니냐?라는 의문을 품도 사람도 있을것이다. 그러나 계속 읽으면서 스스로 판단 하길 바란다.
원폭투하
재일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받은 수많은 차별과 가난 외에도 장훈 선수는 더 많은 시련을 이겨내야 했는데, 그것은 바로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 폭탄 그리고 이듬해 입은 화상이다.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은 불과 장훈 선수의 집에서 3Km 정도밖에 안떨어져 있었으며. 5살이라는 어린나이로 피폭자가 되었는데, 이때의 사고로 장훈 선수는 큰누나를 잃게 된다. 너무 어린나이에 경험한 일이라 기억이 없다라고 말하는 장훈 선수의 인터뷰 내용처럼 아주 큰 첫번째 시련은 이어지는 시련을 무디게 했는지도 모른다.
같은해겨울, 후진하던 작은 트럭에 밀려서 손을 모닥불에 심하게 데이게 된다. 평생 한복을 입으셨다는 어머니가 어린 장훈을 안고 병원으로 뛰어갔을 때, 한국인임을 알아본 일본 의사가 응급치료를 거부하지만 않았어도, 손가락이 조금은 더 정상적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암튼 장훈 선수의 손은 어린시절 입은 화상으로 약지와 애지가 서로 붙어 있다고 한다. 지금까지도 그때입은 화상으로 손가락이 완전히 구부러지지도 펴지지도 않는다.
사람들 중에는 자신의 고생담과 핸디캡을 자랑하는 경우가 있다. 어려운 상황해서 잘 처리 했다며 알아 달라는 건데...농부가 어려운 조건에서 농사 지었다고 자랑하는거 본일 있는가? 하지만 첫마디 부터 "이거 안되는데...이거 힘들어요"는 들어본적이 많지 않은가. 그 일을 해야 하는 일이 직업이면서 말이다. (얘기가 자꾸 빠지는군...) 암튼 장훈 선수는 선수생활동안 자신의 핸디캡인 오른손을 자랑삼아 떠들지 않았다. 프로에서 장훈 선수의 손을 이상하게 여긴 타격코치가 펴보라고 했을때 마지못해 한번 보여준것이 전부라고 한다.
오른손 잡이에서 왼손 잡이로
장훈 선수는 원래 오른손 잡이었으나 어릴적 입은 화상으로 손가락이 자유롭게 구부러지지 않고 오른손으로는 송구가 어려워 왼손으로 야구를 시작한다. 어떤 자료에는 초등학교 4학년때부터 야구를 했다고 하나, 원래 수영부를 가려고 했던 장훈선수는 수영부가 없어 중학교 입학과 함께 야구부에 가입한다. 야구선수로는 조금은 늦은 출발이었고, 또한 화상 때문에 약해진 오른손의 악력을 극복하기위한 남다른 노력이 있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좋은 타격을 위해서는 여러 가지가 필요하지만 그중에서도, 좋은 그립이 필요하고 그와 동시에 강한 악력이 필요한데, 장훈 선수는 좌타자로서는 오른손가락이 완전히 구부러지지 않아 좋은 그립을 기대하기 힘든 조건이었다. 그러나 장훈 선수는 자신의 핸디캡을 극복해 나가는데, 그것은 끊임 없는 연습이었다.
그의 연습량은 아마에서 프로까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습에 몰입했다고 한다. 아마츄어 야구 유망주가 거의 그런거 처럼 장훈 선수도 고등학교때까지는 투수겸 4번 타자 였다. 투수를 못하게된 이유도, 고등학생 시절 연습을 마친 후에 선배가 찾아 오는 바람에 또다시 처음부터 연습을 시작해 하루 수백구를 전력 투구하다 어깨를 다친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는 후문이다.
기다하라 중학시절
중학교 재학 당시에도 유명한 장타자였다. 학교 운동장에서 연습을 하면 공이 반대편 교사 뒤를 넘어 철길까지 날아갔고 , 일부러 철길 주위에서 장훈 선수의 공을 줍는 볼보이가 필요할 정도였다고 한다.
기다하라 중학시절 학교 운동장에서 사소한 시비가 축부와 있었는데, '닥쳐라, 죠센진'이란 말에 장훈선수는 배트로 상대편 머리를 쳐버렸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한국인에다가 폭력 학생이라는 것까지 더해져 히로시마 내에서는 장훈 선수를 받아주는 학교가 없었다고 하는 기사가 있었는데 이부분은 사실이 아닌듯 싶다.
장훈 선수의 체격은 181Cm/85Kg, 그 옛날 이 체격이라면, 실로 먹어주는 체격이다. 우리나라도 아니고 일본에서라면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폭력사건은 항상 장훈 선수를 따라다녔다. 어쩌면 그런 폭력적 이미지는 프로에서 장훈 선수를 폄하 하려는 일본인들의 노력이었을 것이다. ( 프로에서 실제로 아주 커다란 사건도 있었고....나중에 더 자세하게 )야구연습중에 시비가 붙었으니 배트를 들고 있었을 것이고, 머리를 배트로 치는것이 그냥 툭 칠수는 있어도 세게 칠수는 없는것 아닌가?
고교 진학
장훈 선수가 처음으로 입학한 고등학교는 마쓰모토 상고. 그런데 바로 이학교가 어디인지가 중요하다.
웹검색으로 찾아보니 히로시마에서 더 멀리 떨어진 나고야의 마츠모토 고등학교가 있다.
확인!!! 마츠모토 상고는 히로시마에 있었으며 현재 세토우치 고등학교로 이름이 바뀐상태. 따라서 장훈 선를 받아주는 히로시마 내의 학교가 없다는것은 거짓
고교시절 장훈 선수의 꿈은 고시엔 대회 우승이었다. 고시엔 대회를 그냥 단순하게 우리와 비교 하자면 일본의 고시엔 예선 출전 팀 수는 약 4200개 우리는 예선 없이 본선 50 여개 -.- ......게다가 지금도 그런지 모르지만 4강만 오른팀은 나눠먹기식으로 쉬어가면서 출전하고...-.-
고시엔 대회에 나가려면 좋은 야구 팀이 있는 고등학교에 가고 싶은 생각이 컸을것이고, 히로시마의 고등학교들이 안받아 준것이 아니라 장훈 선수 스스로 좋은 팀에 가고 싶어 몰래 오사카에 있는 야구명문 나니와(浪華) 상고 (교명을 줄여서 '니미쇼(浪商)'로 불리는 간사이 지방의 야구 명문교로 선·후배와 동료 중에는 프로야구계에서 이름을 날린 명선수가 많다.) 까지 가서 시험을 쳤다. 시험에는 합격했지만, 그 다음에는 돈이 없어 니미쇼에 진학하지 못하고 마츠모토 상고에 진학 했다고 한다. 그러나 마츠모토 상고에 야구부가 있기는 한데 허접했던 모양이다 「이런 야구부로는 고시엔에 나갈수 없다」고 판단하고 집에서 단식투쟁을 한 끝에 한학기를 마치고 전학을 나니와 상고로 전학을한다.
『우리 가족이 돈이 어디 있어요. 내가 나와서 공부하고 있으니까 돈을 보내야지. 아버지 돌아가시고 하코방 같은 곳에서 어머니가 불고기를 팔고 우리 형이 택시운전을 하면서 돈을 벌었어요. 그게 한달에 2만3000엔 정도 벌어요. 그중에서 1만 엔을 저 에게 보내줘요. 그중에서 6000엔을 하숙비 로 내고 4000엔으로 제가 생활했어요. 4000엔으로 사실 생활하기가 힘들어요. 정말 어려운 생활이었어요. 』
1969년 한국 방문 - 장훈 선수와 어머니
고시엔은 명예 자체로의 의미도 있지만, 고시엔 스타는 졸업후 거액의 계약금으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하는 것이 이상적인 수순이다. 장훈 선수는 프로구단의 입단 계약금을 어머니에게 드리고 싶었다고 술회할 만큼 어린시절 부터 일찍 철이든 선수였다. 가난한 환경속에 고시엔은 오랜시간 기다려온 꿈이었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고교시절 단 한번도 고시엔을 밟지 못했다. 왜? 고시엔을 위해 야구명문으로 전학까지 갔던 장훈 선수...왜 고시엔에 출전하지 못한걸까? 예선탈락이라도 했단 말인가? 아니다 ... 이야기 둘에서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