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8 August 2007

400승 투수 가네다 마사이치

 메이져 리그 역사중 전설적인 투수 싸이 영. 역시 그의 놀라운 기록중에 단연 최고는 개인 통산 511승의 대기록이다. 두번째 개인 최다승 기록 보유자는 417승의 월터 존슨. 세번째 개인 최다승을 기록한 선수는 373승, 피트 알렉산더. 그러나 전세계 야구 역사를 통 털어 다승왕 순위를 정한다면 순위는 달라진다.

1위 싸이 영 511승
2위 월터 존슨 417승
3위 가네다 마사이치 (金田正一) 400승


가네다 마사이치


가네다 마사이치. 한국 이름이 '김경홍' 이라고 하는 자료도 있으나...글쎄...'正一' 이라는 일본식 이름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는 몰라도 한국 이름은 김정일이 아니였을까...암튼 그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재일 한국인 2세 였다..... 물론 이말의 다른 뜻은 지금은 일본인이란 뜻이기도 하다.

1933년 아이치현에서 태어난 그는 등번호 34번으로 아직도 일본 팬들의 기억에 강하게 남아있다. 고교 2학년때 팀의 에이스로 고시엔 우승을 목표로 했지만 준결승에서 패하자 곧바로 학교를 중퇴하고 스왈로스에 입단한다. 장훈 선수도 고교 중퇴후 자이언츠에 입단하라는 제의를 받은 적이 있었다니까, 그당시 상황으로서 고교 중퇴후 프로입단이라는 수순은 그리 특이한건 아니다. 다만 가난을 이기기 위해서 계약금 50만엔에 입단한 가네다 마사이치. 왕정치의 입단 계약금이 당시 1800만엔이였다고 하니 50만엔은 ...그야말로 헐값이였다.


프로 첫 등판은 프로 첫 패배
그의 첫 프로 등판은 입단 첫해 8월 23일 히로시마전 5회말 4 : 5 로 지고있는 상황에 기회가 주어진다.
그리고 스왈로스는 1점을 따라가서 동점을 만들지만 가네다 선수는 끝내기 안타를 허용하고...
그의 프로 첫 등판은 프로 첫 패배로 기록이 된다. 그러나 이날 경기에서 그가 허용한 안타는 바로 마지막 끝내기 안타 하나 뿐이였다는것. 패전의 멍에를 쓰기는 했지만 결코 졌다고 말할 수 없는 첫 등판이였다.


14년간 20승이상 달성
스왈로스 입단 첫해, 후반기인 8월부터 등판 했지만 그는 8승을 거두며 성공적인 데뷔 첫해를 맞는다. 그리고 입단 2년째에는 22 승 과 "노히트 노런"을 달성 한다. 노히트 노런 기록의 제물은 어느 팀이 였을까? 예상밖으로 그당시에도 강팀이였던 한신 타이거스.

20살이 되었을때 부터는 고질적인 제구난을 조금씩 극복하면서 매년 20승 이상을 기록한다. 이런 "20승의 행진"은 무려 14년간 지속되는데, 1957년에는 퍼팩트 게임까지 기록한다. 퍼팩트 게임의 제물은 주니치 드레곤스, 게다가 일본 프로야구사상 세 번째기록이며 최연소로 기록한 퍼팩트 게임이였다.


퍼팩트 게임...최연소 달성

1957 년 8월 21일, 대 주니치전에서 가네다 선수는, 8회까지 타자를 압도한다. 9회말, 주니치 벤치는 자기팀 타자의 하프 스윙에 대한 주심의 판정에 불복하며 강하게 어필한다. 이로 인해 40 분간 경기는 중단된다 ( 이후 경기가 끝난후 그라운드로 난입한 관중들에게 주심이 많이 맞았다지 ㅎㅎ ). 이것은 수치스런 퍼팩트 게임의 희생양이 되지 않으려던 주니치 감독이 투수의 어깨를 식히기 위한 고도의 어필 작전이였을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까지 주니치의 타선을 압도하면서 1:0 의 퍼팩트 경기를 달성한다.


천부적인 능력 그리고 열정그렇다면 어떻게 가네다 마사이치는 이런 놀라운 기록을 올릴수있었을까?
그는 그당시 월등한 체격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186 쎈티미터의 큰 키와 긴 팔 그리고 유연한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속구와 여러가지 커브를 던졌다고 한다.
그가 던진 공이 얼마나 빨랐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중, 가네다 투수의 공을 주로 받던 포수는 엄지 손가락 부분에 가죽을 덧 대어서 포수 미트를 만들었을 정도. 당시 스피드 건이 없었음으로 공식 최고 구속 기록은 없으나 시속 155 킬로미터 정도였을것 이라는 대해 이견이 없다.

그의 투구폼은 긴팔을 활용하는 큰 투구폼으로 다른 투수보다 늦게 손이 나오는 스타일인데다가, 강한 손목의 힘으로 커브의 위력을 더했다. 그의 커브는마치 "2층에서 떨어진다"라고 불릴 정도 였다고 하는데 커브의 종류도 여러가지로 구속과 각을 모두 다르게 구사하는 커브 였다고한다. 나이가 들어가면서는 직구 구속이 떨어지자, 그는 일명 '초 슬로우 커브'라는 신종 구질을 선보이며 타자들의 타이밍을 뺏었다. 천천히 오지만 날카롭게 휘는 구질이였다나...

나는 이런 공을 일명 '떡밥구' 라고 부르는데...타자의 눈에 오랫동안 보이기 때문에 타자는 힘껏 휘두르지만 타이밍을 잡기는 힘들게 되고, 미끼로 쓰이는 떡밥 같다는....


나가시마를 4연타석 삼진으로...
1958년 일본 대학 야구의 스타였던 나가시마 시게오는 프로 데뷔 첫해 시범경기에서 다른 팀의 에이스를 상대로 연일 불방망이를 터뜨리며 실력을 과시한다.
왼쪽에 멋진구두 신은 분이 장훈 선수
가운데 효자신발 신은 분이 나가시마
오른쪽은 인사하는 이승엽


그리고 4월 5일 나가시마의 데뷔전이자 스왈로스와 자이언츠의 시즌 개막전이 시작된다.스왈로스의 선발 투수는 가네다 마사이치. 그당시 언론은 가네다 마사이치와 나가시마의 대결에 관심을 가졌고,나가시마의 압승을 예상하는 분위기 였다고 한다. 그당시 가네다 마사이치 선수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했던 말은 "전타석 삼진으로 잡아 프로의 쓴맛을 보여주겠다"였다.

이날 나가시마는 자이언츠의 3번 타자로 등장하는데
첫 타석에 가네다 투수의 빠른 볼에 삼진으로 물러난다.
4회 제2 타석에서는 날카로운 커브에 타이밍이 맞지 않고 헛 스윙 삼진.
4회에는 파울볼이 하나 있었다고 하는데 어떤이는 파울 볼이 3개 였었다고 하고 어떤이는 파울 볼이 한개 였다고도 한다. 하지만 정확한것은 이날 나가시마가 가네다 투수의 공을 배트에 스치기라도 했던것은 이 파울볼이 전부라는 것이다.
7회의 제3 타석은 3구 삼진.
제4 타석에서는 볼 카운트 2-3 까지 가지만 헛 스윙 삼진.


가네다 투수는 당시 검증받은 신인 나가시마를 4연타석 삼진으로 돌려세우며 공언한 대로 "프로의 쓴맛"을 보여준다.



사실 가네다 선수는 나가시마와의 대결을 위해 전과 다른 훈련량으로 컨디션을 끌어 올리고 있었다고 한다.
"놀고 있어도 이길 수 있었다"고 하는 얘기가 있었을정도 였지만 나가시마와의 대결이 그를 자극하여 그해만은 달랐다는 얘기다.
실제로 가네다 마사이치는 4월에만 10 승을 올릴정도였고, 자신의 시즌 최다인 31 승, 방어율1.30
최다승·최우수 방어율의 타이틀을 획득한다. 게다가 4월30 일의 히로시마전부터 5월 27 일의 히로시마전까지 무려 64 와 1/3 이닝 연속무실점이라는 대기록도 만든다.



"투수도 두려워하던 투수" 가네다 마사이치 통산 38 홈런, 고의 사구 7개를 기록 그는 최고의 투수였으며 동시에 투수중에는 최고의 거포였다. 투수로서 경기에 나와 기록한 홈런이 36개 그리고 대타로 나와서 기록한 홈런이 2개다. 그러니까 개인 통산 38 홈런을 가지고 있다. 주로 홈런이 나오는 경우는 투수의 실투 또는 노리고 있던 공이 왔을때다. 후자의 경우 투수와의 수싸움에서 이겼다는 것인데. 20년간의 선수 생활을 생각하면 한해에 한두개의 홈런을 꾸준히 친것, 재미난 것은 2개의 끝내기 홈런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재미있는것은 그가 보유하고 있는 역대 1위의 기록중, 고의사구를 얻은 경우인데 무려 7개의 고의사구를 얻었다. 20년간 406안타 38홈런 177타점 7도루에 통산 타율은 0.287
한마디로 "투수도 두려워 하던 투수"였다.


그의 별명은 ....."천황"
배용준은 "욘사마" , 이승엽은 "승짱" 으로 불리지만 가네다 마사이치의 별명은 "천황" 이였다.
그는 성격도 호방하고 아주 개성이 강했다고 하는데 실력도 실력이거니와 카리스마 또한 최강이여서
'가네다 덴노(金田 天皇)'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하는데 ....

단체 훈련이 엄격한 일본 프로야구에서 그는 유일하게 개인 훈련을 하는 선수였다. 감독도 그의 개인 훈련 일정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단체 훈련을 올때 개인 침대부터 심지어는 개인 요리사를 데려와서는 밥도 친한 사람들 몇명과만 먹을 정도, 그래서 사람들은 "가네다 레스토랑"이라고 할 정도로 특이한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이런 모습은 시즌중에도 나타나서 감독의 지시와 상관없이 자신이 던지고 싶으면 던지고 내려오고 싶으면 내려올 정도로 그는 "가네다 천황" 이였다.

1960 년 9월 29 일까지 가네다 선수는19 승 밖에 하고 있지 않았다. 어떻게든 1승을 더 쌓아야 하는 상황.
골프장에 가다가 트럭과 정면충돌해 전신 타박의 상처를 입었고 시즌중에는 위장병 까지....몸이 안밖으로 안좋을 때였다고 하는데.....9월30 일의 주니치전, 스왈로스는 선발투수 시마타니가 4회까지 2-0으로 이기고 있었다.
감독은 가네다 선수의 승수를 쌓아주기 위해 교체를 지시하지 않았고, 드디어 5회, 시마타니는 무사 삼루의 위기를 부른다.그러나, 감독의 투수교체의 움직이지 없는 것에 인내심의 한계를 느낀 가네다는, 스스로 마운드에 올라가서 시마타니를 강판시킨다. 물론 감독의 지시는 없었다. 마운드에 오를 때, 가네다 선수는 심판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 던지기 때문에」
 
무사 삼루의 위기를 무실점으로 막은 가네다는, 8회에 1실점을 하지만, 그해에도 20 승을 이루어 낸다.
자기 스스로 승수를 챙기는 경우인데....쩝



자이언츠 타도의 선봉장...자이언츠로
그는 요즘 말로 말하자면 그는 "성격"있는 선수였다. 이런 모습을 엿 볼 수 있는것이 바로 자이언츠 3연전에는 모두 등판했다는 것이다. 뭐 그당시 공공의 적으로 타구단의 타도의 대상이던 자이언츠를 만나면 자원해서 3연전 모두 나가서 던졌다는것. 요즘 생각하면 과연 가능할까라고 생각도 되지만 그만큼 승부욕도 강하고 능력도 뛰어난 선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잘나가던 자이언츠도 가네다 선수만 만나면 맥을 추지 못했다고 하는데 당시 자이언츠는 가네다 선수에게는 "밥"이였다.



1965년 자이언츠로 이적해서 일본시리즈 우승도 맛보고 시리즈 9연속 우승에도 나름대로 공헌을 하였다.


400 승, 기록달성의 순간1969 년,10 월10 일, 자이언츠와 주니치의 경기.
카네다는, 이 시합전 까지 개인 통산 399 승. 하지만, 이 해는 불과 4승 밖에 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세월은 역시 그에게도 찾아온것이다. 

당시 자이언츠 선발 죠우노우치, 4회가 끝낫을때 3-1 로 자이언츠가 리드 하고 있었다.
5회, 자이언츠의 카와카미 감독은, 마침내 가네다를 등판시킨다. 가네다는, 보기 좋게 주니치 타선을 견뎌내면서 7-2로 이겨 개인통산400 승을 달성한다. 이것이 가네다의 현역 마지막 승리였다.

동료 선수들이 달려와 헹가래가 시작되었다. 대투수가「천황」이라고까지 불려진 남자가 울고 있었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은퇴 그리고 기록
가네다 마사이치 선수는 1970년에 현역을 은퇴했다. 일본 귀화 덕뿐인지 아니면 같은 한국계 신격호 회장의 배려 때문인지 1973년 부터 1978 년, 1990년 부터 1991년에 롯데 감독을 맡아 1974 해에는 일본 시리즈 우승까지 한다.


통산기록 : 20시즌 동안 944경기에 등판, 5,526 2/3이닝 투구(1위),
400승(14년 연속 20승, 1위))
298패(1위),
4,490탈삼진(1위),
최다완투 365회,
연속무실점 64 1/3이닝, 승률 0.573,
방어율 2.34
수상기록 : 시즌 최다승 3회, 시즌 최우수방어율 3회,
최다탈삼진 10회, 사와무라상 3회,
베스트나인 3회, 1988년 명예의 전당 헌액자

통산 4,490탈삼진과 400승은 세계 프로야구 통산기록 2위와 3위에 올라 있는 값진 것으로,
탈삼진은 놀란 라이언에 이어 2위, 승수는 전설적인 대투수 사이 영과 월터 존슨에 이어 3위에 랭크돼 있다. 일본 야구장의 크기를 문제삼아 왕정치의 홈런 세계기록을 한사코 인정하려 하지 않는 메이저리그도 가네다의 탈삼진 기록은 군말 없이 공인하여 기념공과 글러브를 쿠퍼스타운의 명예전당에 전시하는 특전을 베풀었다.


최근에 그의 사진을 본적이 있다. 그냥 평범한 노인의 모습....
최근 사진은 안올리는게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건 왜일까?


그는 여러 해 동안 불펜에서 자신의 연습투구를 받아 주다가 왼손 엄지손가락 마비 후유증을 얻은 고교동창생 포수가 고향에서 주유소를 차릴 때 적지 않은 자금을 쾌척해서 개업을 도와준 미담도 지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