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27 August 2005

"불세출의 대타자" 장훈- 이야기 셋

드디어 프로 야구 선수의 시작1959년 고졸 신인으로 도에이에 입단한 장훈 선수는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아마야구 선수에서 드디어 프로야구 선수로서 59년 시즌 첫 경기에 출전 한다. 포지션은 좌익수 그리고 타순은 6번. 그러나 프로 데뷔 첫 타석에서 장훈 선수는 3구 3진을 당한다. 그냥 3진도 아니고 3구 삼진..... 그리고 수비때에는 실책까지 범하면서 호된 신고식을 치루면서 교체되어 벤치에서 남은 경기를 지켜본다.

그리고 숙소로 돌아온 장훈 선수는 밤새도록 스윙연습을 하면서 타격감을 찾으려고 노력을 하고 바로 다음날 경기 첫 타석에서 2루타 , 그 다음 타석에서 홈런을 치며 본격 궤도에 오른다. 6번타자에서 5번 타자를 거치면서 데뷔 첫해 6월 하순부터 4번 타자가 된다 . 일명「19세의 4번 타자」로 신화같은 기록을 남기며, 첫 해 125경기에 출전, 2할7푼5리, 13홈런 57타점으로 신인왕이 됐고, 두 번째 해에 3할을 넘기게 된다. 신인왕 선정에 대해 장선수는 3할 미만의 타율과 한국인이라는 점 때문에 염려 했다고 하지만 기자단 투표에서 141표중 111표를 얻어 압도적인 표차로 신인왕에 선정됐다.

어쩌면 .275가 낮은 타율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일본 프로 진출을 선언한 아시아 홈런왕 이승엽의 첫해 목표가 .29이라는점을 감안 한다면 고졸신인으로는 결코 낮은 타율이 아니다. 또 어쩌면 다른 선수들이 못했기 때문에 신인왕에 뽑혔을거라고 폄하하려는 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 프로야구는 신인왕을 의무적으로 뽑지는 않았다. 59년 장훈 선수를 신인왕으로 뽑았던 퍼시픽 리그는 이듬해 '대상자 없음'을 선언했고, 이후에도 5차례나 더 신인왕을 뽑지 않았다. 가장 최근으로는 2000년에 대상자가 없었다. 센트럴리그도 63년부터 75년까지 4차례나 신인왕을 배출하지 않았을 정도로, 일본 프로 야구는 해당자가 없는 해에는 신인왕을 뽑지 않음으로서 신인왕 타이틀에 대한 권위를 지켜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함께 입단 했던 왕정치는 어땠을까? 고시엔의 스타로 요미우리에 입단한 왕정치(王貞治-오 사다하루).그는 계약금 1800만 엔의 ( 11만 엔의 월급) 이었고 장훈 선수는 계약금 200만 엔, ( 월급 4만5000엔) 이였다. 장훈 선수에 비해 엄청난 금액. 아마도 장훈 선수가 고시엔에 출전했더라면 하는 생각도 해보지만. 암튼 왕정치는 무려 27 타석째에 첫 안타를 치고 첫 해 타율도 1할6푼1리였다. 왕정치 선수를 폄하하려는것이 아니다. 그는 홈런 타자로 키워졌던 것이다. 강팀중에 강팀이던 요미우리로서는 평범한 타자보다는 간판 홈런 타자를 원했던 것이고 계속 큰스윙만을 하도록 왕정치를 훈련시킨 것. 간혹 왕정치와 장훈 선수를 놓고 장훈 선수는 홈런을 많이 치지 못했다고 하는 말을 하는데 홈런 기록만 미리 밝히자면 장훈선수의 통산 홈런은 무려 504개로 역대 일본 프로야구 홈런부분 6위를 기록 하고 있다.

귀화 국적을 바꾸지 말고 구단을 바꿔라

장훈 선수에 대한 이야기를 할때 빠지지 않는것이 귀화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귀화를 하건 안하건 그게 중요진 않다. 특히 일본에서는 말이다. 차별이고 뭐고를 떠나서 한가지 예만 들어보자면, 프로야구 선수들의 해외 전지 훈련때 한국인이던 장훈 선수는 항상 한국을 경유해서 훈련지에 도착했었다고 한다. 물론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당시로서 귀화는 아주 현실적인 문제였다. 그런데 어느날 장훈 선수에게 구단주 오오카와(大川) 가 계약금 인상과 함께 귀화를 권유한다. 형식은 자신의 양자로 해도 좋다고 말할정도로 아주 파격적!!!. 구단주의 생각은 장훈 선수가 외국인으로 되어있어서 외국인 선수 보유 3명중 한명을 차지하는 장훈 선수를 귀화 시킴으로서 팀전력의 상승을 기대했던것이다.

어머니와 가족들에게 이문제를 이야기하자 장훈 선수의 어머니의 말씀은 한마디로 "안된다" 였고 국적을 바꾸느니 구단을 바꾸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이이야기를 전해들은 구단주는 ' 아, 정말 훌륭한 어머니를 두었다"라고 한후 장훈 선수 한명을 위해서 프로야구의 외국인 규약 자체를 바꿔준다. 오오카와 오너는 퍼시픽 리그의 의장을 맡고 있었음으로 끝발이 좀 있었나부다. 암튼 「1945년까지 일본에서 태어난 선수는 일본인과 똑같은 규약이 적용되는 것으로 본다」 이렇게 바꾸면 적어도 외국인 규약에서는 장훈 선수도 일본인과 똑같은 대우를 받으니, 한국 국적을 버리지 않아도 팀은 3명의 외국인 선수를 확보할 수 있었다.


연습
프로 생활동안 줄곧 3할을 유지했더너 장훈 선수의 비결은 무엇이였을까? 비결은 역시 장훈 선수의 끊임없는 노력이었다. 도에이 시절 베팅 케이지에 한번 들어갔다 하면, 본인이 싫증을 느낄 때까지 타격연습을 한 뒤에야 다음 선수와 교대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러고도 모자라 밤에는 손바닥 굳은살이 헤져서 배트 손잡이가 피로 물들고, 스텝한 앞발로 인해 여관방 돗자리가 헤질 때까지 연습으로 지샌 밤이 수없이 많았다.

화상을 입어 붙어 버린 오른손 때문에 오른손의 악력이 많이 부족했던 장훈 선수는 타격코치 마쓰키 겐지로(松木謙治郞) 의 지시대로 오른손 한손으로만 하루에 500개 배팅을 1년 정도 한다. 프로야구 시즌이 개막중일때도, 또 끝났을 때도 쉬지 않았으며. 경기가 있을 때는 경기 시작 전에 하기도 하고 경기를 마치고 하기도 하고 매일같이 하루에 한손으로만 500개의 스윙이 아닌 배팅을 소화하면서 강타자의 면모를 더욱 다듬어 간다.


4번 타자가 도루 41개
1959년 입단해서 신인왕으로 출발한 장훈 선수는
60년 베스트 9, 61년 타격왕과 베스트 나인 62년에는 출루율 1위, 타격왕 베스트 나인 그리고 MVP까지 거머쥐면서 재팬 시리즈 우승으로 팀을 이끈다.


1963년 장훈 선수는 무려 41개의 도루를 기록한다. 타격 못지 않게 발도 빨라 그야말로 '호타준족' 또한 다음해에는 볼넷도 92개. 선구 안도 좋았던 장훈 선수는 볼넷을 많이 골라 내면서 상대 투수를 괴롭히면서 자신의 타율을 유지하는 비결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또하나의 비결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광각타법'이라는 장훈 선수만의 비밀이 있었다.

Saturday, 20 August 2005

"불세출의 대타자" 장훈- 이야기 둘

자 이제 장훈 선수의 고교시절을 알아보자. 앞서서 말했듯이 고시엔에 대한 큰 꿈을 안고 단식투쟁으로 전학까지 갔던 장훈선수.


폭력훈련
장훈 선수가 나니와 상고 일학년때, 학교는 '폭력훈련' 사건에 휘말리게된다. 우리나라는 지금도 그렇지만 예체능 계열의 학교에서 군기를 명목으로 줄빠따가 있는데, 바로 이런 사건이 50년대 중반 일본에서도 있었고 또 그당시에도 물의를 일으켰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사건은 야구부가 아닌 다른 체육부에서 있었던 일이 였는데, 나니와 상고 전체가 일년간 출장 정지 처분을 받게된다. 그렇게 2학년 말까지 장훈선수는 시합출전을 하지 못하고 훈련에만 매진 한다.

드디어 2학년 말에 출장 정지가 풀리면서 근처 학교와 두달간 13 게임을 치루는데, 성적은 타율 5할6푼, 홈런 11개. 그중 홈런 하나는 정전 홈런으로 유명하다. 장훈 선수의 홈런 볼이 전신주를 맞췄는데, 그지역에 정전사태가 벌어진것. 이런 만화 같은 사건이 실제로 장훈 선수에게 있었다. 그리고
장훈 선수의 이야기를 그린 만화가 허영만씨의 "질수없다" 표지, 만화로선 드문 논픽션 만화 그러나 읽다보면 정말 '만화'같은 장훈 선수의 이야기

이제 출장 정지도 풀려서 장훈 선수는 그야 말로 피나는 연습으로 하루하루를 보낸다. 학교에서 연습을 마치면 선배들이 먹을 것을 사줬다고 한다. 뭐 도너츠 같은 거라고 하는데 암튼 배를 채우고 곧바로 강변에 묶어놓은 타이어를 밤늦게까지 두드렸다고도 한다. 재일 한국인이라는 차별과 멸시 그리고 가난을 두드리면서 고시엔이라는 희망을 키우고 있었던것. 치열한 지역 예선을 통과 해야만이 본선에 오를수 있는 고시엔. 그래서 흙도 퍼가고 ( 어떤 투수가 마운드의 흙을 담는 모습이 티브이에 방송 되면서 부터 흙퍼가는 전통이 생겼다고하는데....암튼 ) 고시엔 본선 진출 자체가 영광이 되는것이다.

3학년 또 폭력 사건이 벌어 지는데.....

앞서 말한 폭력 사건이 다른 운동부의 군기를 잡기위한 줄빠따 사건이라면, 이 사건은 다르다. 야구부 선배가 야구부 후배를 때렸다는 것인데....자세히 알아보자, 그당시 일본에는 선생님들이 시내를 다니면서 학교를 안가고 돌아 다니는 학생들을 단속을 했다. 그런데 야구부원 3~4명이 연습 땡땡이를 치고 시내를 다니다가 단속하는 선생들한테 걸린것. 그래서 변명이랍시고 이것들이 한말이 "선배들이 때려서 안갔다" 바로 이게 문제가 된다.

일년전에 교내 모든 운동부가 출장 정지를 받았고 이제 막 출장 정지가 풀렸는데 2년 연속으로 폭력 사건이 벌어지자 기다리는 것은 또 출장정지. 바로 그때 등장하는 악역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모리모 토라는 야구부 담당 선생. 이 잣같은 사람이 한국 사람을 아주 싫어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놈이 아이디어라고 내놓은것이 있었으니... 바로 장훈 선수의 제명이다. 장훈 선수 혼자서 한짓이며 다른 일본인 학생들은 때리지 않았다고 장훈 선수 한명을 제명 시키면서 결국 나니와 상고의 출장정지를 막게되는것. 하지만 이사실을 알게된 하급생들이 선생을 찾아가 하리모토 선배는 때리지 않았다고 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제명은 진행된다.

훗날 장훈 선수는 야구부 담당 선생을 죽어도 용서할수 없다고 말할정도로, 노령의 나이임에도 분노를 참지 못하고 있다. 장훈 선수는 주전 선수였고 비주전인 3학년 학생들이 주로 군기를 잡았다는 것이다. 원래 실력이 모자라면 고학년이여도 후보신세를 면치 못한다. 그러면 싸이는 스트레쓰는 후배들 차지. 결국 고시엔을 위해, 고생하는 어머니를 위해 단식까지 하며 어려운 형편에 전학을 온 학교 였는데, 출장정지 뿐이 아니라 야구부에서 제명까지 당하게된다. 그리고 장훈 선수 없는 나니와 상고는 고시엔 지역 예선 조차 통과 하지 못한다.


장훈 선수를 탐내던 요미우리 자이언츠
그래도 2학년때부터 초고교급의 실력을 보인 장훈 선수임으로 프로팀에서 접촉이 없었던건 아니다. 이미 2학년때 당시요미우리 자이언츠의 水原茂(미즈하라) 감독으로부터 입단 제의를 받고 있었다. 미즈하라 감독은 학교를 중퇴하고 입단을 하라고 까지 얘기를 했다. 그러나 장훈 선수의 형님이 고등학교만은 나와라」고, 「프로야구 가서 성공 하면 되지만, 실패했을 경우, 고등학교도 못 나왔다고 하면 회사에 취직하기도 힘들다」 그래서 장훈 선수의 고등학교 졸업까지 자이언츠는 기다리겠다고 하면서 계약금 300만엔으로 입단 내정이 된 상태였다.

3학년 여름쯤에도 미즈하라 감독이 장훈 선수를 찾아온다. 그러면 제명이후 장훈 선수는 요미우리에 갔을까? 답은 아니다. 제명까지 당했으니 프로로 바로 가면 될것이지만, 자이언츠 구단에서 장훈 선수의 폭력 사건을 문제삼아 입단이 거절된다. 유망주이던 장훈 선수는 이제 야구도 할수 없게 되었고 고등학교 3학년이라는 시간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다.

야구부에서 완전히 제명된후, 야구를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장훈선수의 방황은 짐작이 간다. 장훈 선수는 만약 자신이 야구를 하지 못했다면 아마 야쿠자가 되었을 거라고 한다. 이를 뒷받침 하는 증거로서, 학교는 야쿠자가 많다는 오사카에서 다녔으며, 실제로 재일 한국인들에 대한 차별 때문에 취직이 어려워, 스포츠계, 연예계 그리고 야쿠자로 많이 진출 한것도 사실인데다가, 50년대말 181cm라는 큰 키와 체격 그리고 주먹을 갖춘 장훈 선수에게도 엄청난 야쿠자의 스카웃(?)제의가 있었다는 설도 설득력을 갖는다.

어떤 일본 사이트에 올라온 글에는 장훈 선수의 함께 야구를 했던 일본 친구가 실제로 야쿠자가 생활을 했던 모양인데, 장훈 선수는 싸움도 잘했지만 야구를 너무 좋아해서 야쿠자에 들어가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암튼 야구를 하기 위해 히로시마에서 오사카의 학교까지 갔지만, 야구를 할 수 없게된 장훈선수.그러나 그해 1958년 여름,어머니는 당시 고3의 장훈선수를 "재일교포 고등학생 선발 야구단(3회)"에 입단 시킨다. 야구를 하지 못해서 방황하는 아들을 위해 야구와 민족교육을 함께 할 수 있는 기회를 준것이다.

선수에게 1년은 그냥 1년이 아니다. 내가 다른 포스팅에서 박철순 선수의 재기를 높이 평가하는것도 이때문이며, 어린 선수가 훈련을 못하게 되었을때 망가지는 것은 하루아침이기 때문인데. 암튼 이당시 장훈 선수는 "재일교포 고등학생 선발 야구단"으로 난생 처음 한국을 방문하게 된다. 이 당시 장훈 선수는 처음으로 고국이란 어떤것인지 느꼈다고 한다. 그 전까지 어머니에게 말로만 들었던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는 것. 경기 결과도 뛰어나서 한국에서의 시합에서도 '연일 맹타를 휘둘렀다'고 하는데 당시 성적은 찾을 수 없었다.


고교 졸업후...

어느덧 시간이 흘러 고등학교 졸업을 하게된다. 그때 무려 9개의 구단이 장훈 선수를 스카웃하려고 하는데 장훈 선수와 어머니의 결정은 어떤 팀이 였을까? 그것은 바로 도에이 플라이어즈. 이전에는 쎄네이터스(1946) 그리고 플라이어즈 (1947-73)를 거쳐 현 니혼햄 파이터스까지 별로 두드러진 강팀도 아니였고 스타 플레이어도 없던 팀이였다. 그런데 왜 하필 이름도 이상한 도에이 플라이어즈 였을까?

도에이 플라이어즈 시절의 장훈 선수. 날씬한 모습으로 보아 입단 초기가 아니였을까 추측해봄

플라이어즈의 이와모도 감독이 직접 장훈 선수의 어머니가 계시던 히로시마 연립주택을 찾아와 무릎을 꿇고 앉아 "저에게 맡겨 주시면 꼭 장훈을 훌륭한 선수로 만들겠다" 라고 성의 있는 교섭태도를 보였다는것. 계약금이나 돈을 갖고 접근했던 구단들과는 그야말로 성의 있는 자세의 감독이였던것이다.

당시 야구전문 잡지는 장훈 선수의 도에이 입단에 대해 '도에이의 대홈런'이라고 특보 할 정도로 장훈 선수는 주목받던 신인이였다. 재미를 위해 하나더 말하자면, 장훈 선수가 허접한 도에이에 입단할 무렵, 고시엔의 스타가 되었던 왕정치는 최강팀인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한다.

프로선수 시절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포스팅으로....

Thursday, 11 August 2005

"불세출의 대타자" 장훈- 이야기 하나

장 훈(張 勳) 선수.....이야기의 시작...

철이 들어서야 장훈 선수의 위대함을 알았으니.....

장훈 선수에 대해 검색을 하면 주로 나오는것이 김장훈, 서장훈이다. 그래도 이것저것 찾아보다, 일본 웹 검색을 해보니 더 많은 자료에 놀랐었다. 사실 일본에서 활약을 했으니 당연한것이 겠지만...
장훈 선수의 위대함에 푸욱 빠져서 장훈 선수에 대한것들을 찾아보고 재미있어하고 ...암튼, 나에게도 이런 오타쿠 적인 면이 있었으니.... 정말 영화 같은,만화 같은 , 위인전 같은 그의 이야기를 시작하자.

장훈 선수는 1940년 6월 19일, 일본의 히로시마에서 태어났다. 경남 창녕에서 면서기를 지낸 장상정씨와 어머니 박순분 ( 박남전,朴南田 ) 씨의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6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며 더욱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내게된다. 일제시대에 면서기를 지낸 아버지라고 하면 친일파가 아니냐?라는 의문을 품도 사람도 있을것이다. 그러나 계속 읽으면서 스스로 판단 하길 바란다.


원폭투하
재일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받은 수많은 차별과 가난 외에도 장훈 선수는 더 많은 시련을 이겨내야 했는데, 그것은 바로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 폭탄 그리고 이듬해 입은 화상이다.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은 불과 장훈 선수의 집에서 3Km 정도밖에 안떨어져 있었으며. 5살이라는 어린나이로 피폭자가 되었는데, 이때의 사고로 장훈 선수는 큰누나를 잃게 된다. 너무 어린나이에 경험한 일이라 기억이 없다라고 말하는 장훈 선수의 인터뷰 내용처럼 아주 큰 첫번째 시련은 이어지는 시련을 무디게 했는지도 모른다.

같은해겨울, 후진하던 작은 트럭에 밀려서 손을 모닥불에 심하게 데이게 된다. 평생 한복을 입으셨다는 어머니가 어린 장훈을 안고 병원으로 뛰어갔을 때, 한국인임을 알아본 일본 의사가 응급치료를 거부하지만 않았어도, 손가락이 조금은 더 정상적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암튼 장훈 선수의 손은 어린시절 입은 화상으로 약지와 애지가 서로 붙어 있다고 한다. 지금까지도 그때입은 화상으로 손가락이 완전히 구부러지지도 펴지지도 않는다.

사람들 중에는 자신의 고생담과 핸디캡을 자랑하는 경우가 있다. 어려운 상황해서 잘 처리 했다며 알아 달라는 건데...농부가 어려운 조건에서 농사 지었다고 자랑하는거 본일 있는가? 하지만 첫마디 부터 "이거 안되는데...이거 힘들어요"는 들어본적이 많지 않은가. 그 일을 해야 하는 일이 직업이면서 말이다. (얘기가 자꾸 빠지는군...) 암튼 장훈 선수는 선수생활동안 자신의 핸디캡인 오른손을 자랑삼아 떠들지 않았다. 프로에서 장훈 선수의 손을 이상하게 여긴 타격코치가 펴보라고 했을때 마지못해 한번 보여준것이 전부라고 한다.


오른손 잡이에서 왼손 잡이로
장훈 선수는 원래 오른손 잡이었으나 어릴적 입은 화상으로 손가락이 자유롭게 구부러지지 않고 오른손으로는 송구가 어려워 왼손으로 야구를 시작한다. 어떤 자료에는 초등학교 4학년때부터 야구를 했다고 하나, 원래 수영부를 가려고 했던 장훈선수는 수영부가 없어 중학교 입학과 함께 야구부에 가입한다. 야구선수로는 조금은 늦은 출발이었고, 또한 화상 때문에 약해진 오른손의 악력을 극복하기위한 남다른 노력이 있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좋은 타격을 위해서는 여러 가지가 필요하지만 그중에서도, 좋은 그립이 필요하고 그와 동시에 강한 악력이 필요한데, 장훈 선수는 좌타자로서는 오른손가락이 완전히 구부러지지 않아 좋은 그립을 기대하기 힘든 조건이었다. 그러나 장훈 선수는 자신의 핸디캡을 극복해 나가는데, 그것은 끊임 없는 연습이었다.

그의 연습량은 아마에서 프로까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습에 몰입했다고 한다. 아마츄어 야구 유망주가 거의 그런거 처럼 장훈 선수도 고등학교때까지는 투수겸 4번 타자 였다. 투수를 못하게된 이유도, 고등학생 시절 연습을 마친 후에 선배가 찾아 오는 바람에 또다시 처음부터 연습을 시작해 하루 수백구를 전력 투구하다 어깨를 다친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는 후문이다.

기다하라 중학시절
중학교 재학 당시에도 유명한 장타자였다. 학교 운동장에서 연습을 하면 공이 반대편 교사 뒤를 넘어 철길까지 날아갔고 , 일부러 철길 주위에서 장훈 선수의 공을 줍는 볼보이가 필요할 정도였다고 한다.

기다하라 중학시절 학교 운동장에서 사소한 시비가 축부와 있었는데, '닥쳐라, 죠센진'이란 말에 장훈선수는 배트로 상대편 머리를 쳐버렸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한국인에다가 폭력 학생이라는 것까지 더해져 히로시마 내에서는 장훈 선수를 받아주는 학교가 없었다고 하는 기사가 있었는데 이부분은 사실이 아닌듯 싶다.

장훈 선수의 체격은 181Cm/85Kg, 그 옛날 이 체격이라면, 실로 먹어주는 체격이다. 우리나라도 아니고 일본에서라면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폭력사건은 항상 장훈 선수를 따라다녔다. 어쩌면 그런 폭력적 이미지는 프로에서 장훈 선수를 폄하 하려는 일본인들의 노력이었을 것이다. ( 프로에서 실제로 아주 커다란 사건도 있었고....나중에 더 자세하게 )야구연습중에 시비가 붙었으니 배트를 들고 있었을 것이고, 머리를 배트로 치는것이 그냥 툭 칠수는 있어도 세게 칠수는 없는것 아닌가?

고교 진학
장훈 선수가 처음으로 입학한 고등학교는 마쓰모토 상고. 그런데 바로 이학교가 어디인지가 중요하다.
웹검색으로 찾아보니 히로시마에서 더 멀리 떨어진 나고야의 마츠모토 고등학교가 있다.
여기는 이름만 같은 마츠모토 고교 일뿐.

그런데 마츠모토 고등학교에서 얼마 안떨어진 곳에 "조선학원"이 있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 마츠모토가 "그" 마츠모토인줄 알았는데... 그렇다면 오사카로 전학할때 돈( 하숙비용 등등 ) 이 없어서 힘이 들었다는 장훈 선수의 이야기로 미루어보아. 아마도 이 학교는 히로시마 내에 있었던 학교일것이다. 만약에 히로시마에 있는 또는 있었던 학교라면 장훈 선수를 히로시마에서 받아주는 학교가 없었다는건 사실이 아닌것이다.

확인!!! 마츠모토 상고는 히로시마에 있었으며 현재 세토우치 고등학교로 이름이 바뀐상태. 따라서 장훈 선를 받아주는 히로시마 내의 학교가 없다는것은 거짓

고교시절 장훈 선수의 꿈은 고시엔 대회 우승이었다. 고시엔 대회를 그냥 단순하게 우리와 비교 하자면 일본의 고시엔 예선 출전 팀 수는 약 4200개 우리는 예선 없이 본선 50 여개 -.- ......게다가 지금도 그런지 모르지만 4강만 오른팀은 나눠먹기식으로 쉬어가면서 출전하고...-.-

고시엔 대회에 나가려면 좋은 야구 팀이 있는 고등학교에 가고 싶은 생각이 컸을것이고, 히로시마의 고등학교들이 안받아 준것이 아니라 장훈 선수 스스로 좋은 팀에 가고 싶어 몰래 오사카에 있는 야구명문 나니와(浪華) 상고 (교명을 줄여서 '니미쇼(浪商)'로 불리는 간사이 지방의 야구 명문교로 선·후배와 동료 중에는 프로야구계에서 이름을 날린 명선수가 많다.) 까지 가서 시험을 쳤다. 시험에는 합격했지만, 그 다음에는 돈이 없어 니미쇼에 진학하지 못하고 마츠모토 상고에 진학 했다고 한다. 그러나 마츠모토 상고에 야구부가 있기는 한데 허접했던 모양이다 「이런 야구부로는 고시엔에 나갈수 없다」고 판단하고 집에서 단식투쟁을 한 끝에 한학기를 마치고 전학을 나니와 상고로 전학을한다.

『우리 가족이 돈이 어디 있어요. 내가 나와서 공부하고 있으니까 돈을 보내야지. 아버지 돌아가시고 하코방 같은 곳에서 어머니가 불고기를 팔고 우리 형이 택시운전을 하면서 돈을 벌었어요. 그게 한달에 2만3000엔 정도 벌어요. 그중에서 1만 엔을 저 에게 보내줘요. 그중에서 6000엔을 하숙비 로 내고 4000엔으로 제가 생활했어요. 4000엔으로 사실 생활하기가 힘들어요. 정말 어려운 생활이었어요. 』


1969년 한국 방문 - 장훈 선수와 어머니

고시엔은 명예 자체로의 의미도 있지만, 고시엔 스타는 졸업후 거액의 계약금으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하는 것이 이상적인 수순이다. 장훈 선수는 프로구단의 입단 계약금을 어머니에게 드리고 싶었다고 술회할 만큼 어린시절 부터 일찍 철이든 선수였다. 가난한 환경속에 고시엔은 오랜시간 기다려온 꿈이었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고교시절 단 한번도 고시엔을 밟지 못했다. 왜? 고시엔을 위해 야구명문으로 전학까지 갔던 장훈 선수...왜 고시엔에 출전하지 못한걸까? 예선탈락이라도 했단 말인가? 아니다 ... 이야기 둘에서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