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26 September 2005

"불세출의 대타자" 장훈- 이야기 다섯

순전히 실력 하나로만 일본 프로 야구 퍼시픽 리그 최고의 타자로 자리잡으며 일본 최고의 강팀인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스카웃된 장훈 선수, 지금까지는 재일 한국인인 장훈선수를 쫒아다니던 차별과 멸시는 없는듯 해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포수들은 상대팀 타자의 기분을 상하게 하기 위해서 이른바 말로 '겐세이'를 거는데, 관중들 까지도 장훈 선수가 타석에 들어서면 야유가 쏟아져 나오곤 했다. 주로 내용들은 마늘냄새 김치냄새 등등, 이럴때면 항상 장훈 선수는 더욱 악착같이 안타를 쳐야겠다고마음 먹었다고 한다.

또한, 장훈 선수는 투수가 빈볼을 던지면 아주 강하게 어필했다. 이것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함이였으나 이런 모습이 폭력적인 이미지가 더해지는데 한몫했다고도 볼수있다. 그러나 실제로 일본에 진출한 한국인 타자들 이종범( 공에 맞아 오른쪽 팔꿈치 부상), 이승엽 ( 몸에 맞는공과 위협구 때문에 첫해 고전 ) 등이 투수들의 빈볼성 공에 고전했다. 만약 장훈 선수 같이 강하게 어필 했다면 아마도 투수들이 더 고전했을지도 모를일이다.

장훈 선수는 강한 어필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단한번도 먼저 때리거나, 심판에게 퇴장명령을 받은 적은 없다는 것이다. 빈볼에 때문에 투수를 때린적도 있지만 먼저 때린것이 아니며 , 심판이 '이젠 그만해'라고 하면 바로 그만했다는 것이다. 화가 나지만 참을 때 참았다는 것인데 어디 그게 쉬운일인가 말이다.



장훈 선수와 왕정치 선수

일본 사람들이 장훈 선수를 폄하할때 곧잘 왕정치 선수와 비교 한다. 장훈 선수와 왕정치 모두 일본인이 아니지만 왕정치는 신사적이 라는 것이다. 그러나 왕정치는 귀화를 했다. 일본은 사회적으로 귀화한 사람들에게 대해서는 공격적이지 않는다. 또 요미우리가 어떤 회사인가? 언론 재벌아닌가, 따라서 왕정치 선수에게 비신사적인 행동을 한 선수는 바로 그다음날 비겁한 선수로 낙인이 찍히게 된다. 정면 승부를 하지 않은 투수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장훈 선수는 귀화도 하지 않았고 소속팀의 방패도 없었다 다만 기자들에게 폭력적인 이미지가 추가되어 아주 좋은 '기사감 이 였던 것이다.

히로시마 폭력 사태
1976년, 자이언츠의 히로시마 원정경기때, 폭력사태가 벌어진다. 9회 초, 1점차로 뒤진 자이언츠의 마지막 공격, 2루에 있던 주자가 안타때 홈에 들어오다가 아웃이 된다. 이때의 판정시비로 감독이 항의하러 나가는데, 갑자기 관중이 한사람이 그라운드로 내려와서 방망이를 가지고 감독을 때리러간다. 이것을본 벤치에 있던 자이언츠 선수들이 나가게되고,폭력사태가 벌어지는데 문제는 그이후에 벌어진다

경기가 끝나고 나가서, 버스를 타려는 자이언츠 선수들에게 200~300명 정도의 관중이 달려든다. 서둘러 버스에 오르는 장훈 서누를 잡고 늘어지던 시민을 발로 차고 장훈 선수는 버스 계단을 오르지만 또 달려드는 관중을 배트로 후배 선수가 팍 친다 ( 찌르듯이 쳤을것 ). 배트에 머리를 맞은 관중은 피를 흘리며 「하리모토에게 얻어맞았다」고 소리를 지른다. 그 다음날 장훈 선수는 누명을 쓰게 되고 신문의 머리기사를 장식하게 되는데, 급기야 장훈 선수의 어머니 댁에는 돌까지 날아든다.

장훈 선수에게 인삼-닭고기 ( 인삼과 닭고기인지 삼계탕인지 모르겠음 )를 주려고 구장에 와있던 어머니와 형님은 그 상황을 옆에서 보고 있었던것. 어머니는 「왜 사실을 밝히지 않느냐」. 「네가 하지 않았다는데, 형이 옆에서 봤다는데, 후배가 했다고 하면 될 거 아니냐」하셨으나, 장훈 선수는「엄마, 나를 도 와주려고, 내가 맞으려고 하는 것을 막아주 려고 후배가 중간에 들어와서 내대신 한 일인데, 어떻게 제가 말을 하겠습니까. 기다려 주세요. 꼭 진실은 나중에 알려질 테니까」라고 말하고 경찰 조사에 응한다.

조사중에도 사실은 후배가 배트로 시민의 머리를 쳤다고 했으면 쉽게 끝날일이였으나 장훈 선수는 계속 「안했다」고만 했다고 한다. 이 조사는 한달 넘게 끌면서 순사-경사-경시정(? 꽤 높은 직책인가봄 )과도 대면을 하게 되는데 이때 장훈 선수는 「진실은 하나다」라고만 말하자 잠시후 모든 수사 의뢰를 기각 시켰다나. (장훈 선수도 멋지지만 경시정인가 하는 사람도 꽤 멋진 사람인다) 암튼 그렇게 시간이 흘러 또 한달가량 시간이 지났을 무렵 후배가 시민을 배트로 때리는 사진 공개 되면서 매스컴에 진실이 밝혀진다.

이부분은 상당히 언론의 암묵적 동의가 있었던것 같다. 증거 사진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 기자인지 시민인지는 모르지만 시민들이 몸싸움 하는 과정에 버스 앞까지 가서 사진을 찍을 시민이 있을까?라고 생각하면 위에서 설명한 '기사감'은 상당히 설득력을 갖는다. 증거 사진을 히로시마폭력사건 이후 무려 두달이 지나서야 발표한 것인데. 뒤늦게 특종을 노리던 기자의 욕심이였을까? 아니면 장훈 선수를 끝까지 폭력적 이미지의 선수로 남게하려 했던 것일까?

그런데, 특이한점은 이 사건 발발 직후 기자들이 찾아간 곳이 있었으니 거기는 다름아닌 히로시마의 우리 민단 ( 재 일본대한민국 거류민단 )이다. ( 사실 이부분에 대해 뭐라 논하기는 난감했지만 그냥 내 블로그니 내맘대로 쓰련다.) 이상하지 않은가? 재일 한국인이였지만 일본에서 태어났으며 외국인 선수 규정까지 바꾸면서 뛰게된 선수가 장훈 선수다. 박찬호 선수가 이단 옆차기 했을때 한국 대사관 와서 인터뷰 하는 기자가 있었나? 이것은 폭력사건을 장훈 선수 개인의 일에서 재일 한국인 전체의 일로 확대 하려는 일본 언론의 의도 이외에 무엇이 있나 말이다. 작은 사건을 국가적인 이미지로확대 하려는음모. 이런것이 일본 넘들이 주로 하는 수작인데.....씁쓸하다.

히로시마 펜들에게 사과를 받다.
결국 진범이 밝혀진뒤, 또 히로시마 구장 경기중. 관중석에서 좌익수를 보던 장훈 선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처음에는 야유소리라고 생각하고 뒤를 보지 않던 장훈 선수는 계속되는 「하리모토!」소리에 뒤를 돌아본다. 몇몇 사람이 머리를 박박 깎고 무릎을 꿇고 앉아. 잘못했다고, 자기들이 오해했다며 사과를 한것. 장훈선수도 15세까지는 히로시마에서 태어나서 살았으니 히로시마 사람이나 다름없었던것. 하지만 유독 76년 히로시마를 상대로 맹타를 휘두르던 장훈 선수를 곱지 않은 눈으로 보는 히로시마 펜들이 많았다니 이또한 재미있는 점이다.






1976년, 빼앗긴 타격왕?
1976년은 요미우리 이적 첫해이다. 그런데 기록을 보면 의문점이 생긴다. 130경기에 출전해서 리그 최다 182 안타를 쳤다. 타율 .355 그러나 타격왕은 장훈이 아니였다. 최다안타가 최고 타율까지이 되란 법은 없지만.....의문이 생긴다

시즌 막판까지, 장훈 선수는 주니치의 야자와 겐이치(谷澤健一)와는 모(毛) , 할,푼,리,모 10000분의 일까지 겨루는 치열한 타격경쟁을 벌이고 있었다고 한다. 자이언츠의 리그 마지막 경기는 나고야에서 홈팀 주니치를 상대하게 된다. 장훈 선수의 강습타구는 필사적으로 슬라이딩한 유격수의 글러브 끝을 스치고, 2루 베이스와 유격수 사이를 꿰뚫었다. 그러나 잠시후, 전광판에는 '실책'으로 기록이 되자,자이언츠의 코칭스태프와 주력선수들이 일제히 뛰쳐나와 기록원석을 향해 항의를 하고 기자석에서는 격렬한 야유가 터졌으나 판정이 번복되진 안았다고 한다.

당연한 안타를 실책으로 기록하는 히로시마
강습 타구의 경우는 기록이 안타로 나는게 정상이다. 만약에 야수 정면으로 향하는 강한 타구를 잡지 못했다면 실책으로 기록되는것이 당연하지만 슬라이딩 캐치를 실패 했다 하더라도 실책으로 기록되지는 않는다. 다만 슬라이딩 캐치후에 송구 동작에서 일어난 실수라면 실책이겠지만 쪽발이들의 치졸함이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미 얼마 전 다른 경기에서도 이와 비슷한 불리한 판정을 받은 일이 있는 장훈 선수의 분노는 자못 컸다. 더우기 1루 베이스 위의 주자 장훈 옆에 서 있는 주니치 1루수가 얄궂게도 바로 경쟁상대인 야자와였다. 그래도 장훈은 그 시점에서 타율이 약간 앞서 있었지만 다음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야자와가 3타수 3안타를 치면 1모 차로 역전될 형세였다. 그런데 만약 장훈 선수의 이번 타구가 안타로 기록되었으면 야자와는 다음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5타수 5안타를 쳐야 이기는 상황이였으니 음모 말고는 다른말로 뭐라 하겠나. 역시 일본 넘들은 치사하고 야비한데...주도면밀까지 했으니....

야자의 소속팀인 주니치의 다음 경기는 시즌 마지막 경기로 대 히로시마 원정 경기. 히로시마의 재일동포 투수 가네시로 모도야스(金城基泰)는 마치 '쳐 주십시오' 하듯이 야자와에게 스피드를 죽인 직구를 한가운데로만 던지고 내야수는 타구를 끝까지 쫓아가지 않는 따위의 낯뜨거운 더티플레이로 기어이 3안타를 만들어 주어 수위타자 타이틀은 야자와에게 돌아갔다.역시 일본인들의 주도 면밀함은.... 한국인을 이용한 한국인 죽이기랄까? 언제나 앞잡이를 내세우는 이런 비열함에 또 고스란히 이용당하는 앞잡이들.

이 앞잡이 사진 우선 공개-짠물-삼미수퍼스타즈 홈페이지에서 퍼옴
이런 얼굴인 남자들은 만나지 않는것이 좋을듯-기분 나쁘니까 자주 보지도 말것
나중에 짧게라도 이 선수에 대한 글을 쓸것임, 왜냐면 또 꾸물꾸물 우리나라로 와서 선수생활을 2년 동안이나 했으니까

정정 당당한 승부였다면 누가 무어라 하겠냐만은 너무나도 일본 프로야구사에 부끄러운 기록으로 남을것이다. 잘해도 너무 잘한 장훈 선수 탓을 할수는 없지 않은가. 타격왕이라는 자리를 무려 7번이나 차지한 이후 만약 장훈 선수가 또 수위타자 자리에 올라간다면 일본 프로야구 역사상 양대리그 타격왕이 탄생하는 중요한 순간이였던 것이다. 장훈 선수는 이 판정만은 지금껏 체념을 못하고 있다고 하는데 ...암튼 타율이나 알아보자....

야자와의 타율이. 3548, 장훈 선수가 . 3547 ...........
결과는 장훈 선수의 1모차의 패배였지만 일본 프로야구사를 더럽힌 타율 조작이였던 것이다.

다음은 장훈 선수의 이어지는 활약상과 역도산과의 내용이 이어집니다.

Friday, 16 September 2005

"불세출의 대타자" 장훈- 이야기 넷

광각 타법이란?광.각.타.법. (廣角打法) 이것은 장훈 선수를 얘기할 때 빠질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광각타법이란 무엇인가? 흔히 타자들의 타구 방향은 어느 정도 한쪽으로 치우치게 되있다. 우중간이라던 지 좌중간이라던 지...따라서 벤치는 그런 데이터를 바탕으로 수비진의 쉬프트를 변경시킴으로서 안타성 타구를 잡아내는 경우를 보았을 것이다.그러나, 광각타법은 타구의 방향이 좌우 가리지 않고 골고루 퍼져 나간다. 따라서 광각타법이외에, 부채살 타법, 스프레이 타법 등으로 불리는 타법이다. 투구의 코스를 거스르지 않고 당기고 밀어서 좌·중·우 어느 쪽이건 원하는 방향으로 타구를 날려 보낼 수 있는 고난도 기술의 타법인 것이다.

몸쪽 공을 당겨 친다거나 바깥쪽 공을 밀어 치는 것은 비교적 가능한 것이지만 그와 반대로 몸쪽 공을 밀어치고 바깥쪽 공을 당겨 치는 타법, 원하는 방향으로 타구를 보낼 수 있는 타법이며 아주 효율적으로 안타를 만들 수 있는 타법이 바로 광각 타법인 것이다. 예를 들어 주자가 일루에 있다면 일이루간은 넓어져서 그사이로 공을 굴려 보내기만 하면 안타가 나오는 것이다.

5~6년간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광각 타법이 완성된 것은 장훈 선수가 약 24세 무렵이라 한다. 1967-1970 까지 4년 연속, 리그 수위 타자인 타격왕을 차지한다. 그러자 붙여진 별명이 바로 안타 제조기이며 장훈 선수의 타법에도 광각타법이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된 것. 얼마나 이 광각 타법이 유명했는가 하면 장훈 선수가 은퇴 후에 각 구단에서 장훈 선수를 초빙해서 광각타법을 강의 하도록 할 정도 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야구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장훈 선수의 광각 타법을 가장 잘 따라하는 선수는 스즈키 이치로 라는 말도 있다. 그만큼 장훈 선수의 광각타법은 계속 일본에서 이어져 왔던 것이다.

도에이 플라이어스는 니타쿠 홈 플라이어스로 이름이 바뀌고 다시 니혼햄 파이터스로 바뀌게 되는데 그사이 장훈 선수는 타격왕 7번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1975년 .276라는 저조한 타율로 75년 시즌을 마감한다. 그때 나이가 우리나이로 벌써 36살 이였다. 그런데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장훈 선수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온다. 왜 일까???


창단 후 첫 꼴지를 기록한 자이언츠 장훈 선수가 필요하다
일단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어떤 팀일까? 간단하게 말하자면 65년부터 73년 까지 무려 9번의 일본 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국가대표 프로 야구팀이라고 할 만한 팀이다. 거의 일본인중 40%(혹은 그 이상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으나)가 좋아할 정도의 강팀이다. 그런데 팀 내의 4번 타자 「나가시마 시게오」(長嶋茂雄)가 은퇴 후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감독으로 부임한 첫해, 꼴찌를 하게 된다.73년까지 우승했었는데 감독이 바뀌자 바로 꼴지 ㅋㅋ 나가시마 감독의 경기 운영 미숙을 보여주는 여러 일화중 하나가 바로 몸을 풀고 있는 투수대신 벤치에서 앉아있던 투수로 교체한다던가 등등 인데 암튼 그는 실력보다 운이 좋았고, 능력보단 외모가 뛰어났다.

원래 자이언츠의 중심 타선은 ON포로 불리던 왕정치와 나가시마였다. 「O」는 868개의 홈런으로 홈런 세계 최고 기록을 가지고 있는 왕정치(王貞治)의 일본발음인 「오 사다하루」의 이니셜이고 , 「N」은 역시 1960년대 일본 프로야구 최고 인기선수의 한 사람이었던 「나가시마 시게오」(長嶋茂雄)의 이니셜이다. 두 사람은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최전성기인 1960년대 3, 4번을 치면서 요미우리의 일본시리즈 9연패를 이룩했던 주인공들. 당시 언론에선 이 두 사람을 합쳐 무적의 「ON 타선」이라 불렀다. 이부분에 있어서, 프론트와 벤치의 분석은 나가시마와 같은 중심타자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일리 있는 말이지만 나가시마의 팀운영 미숙이 한몫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혼자 있는 강타자는 투수들이 왕정치 하나만 공격하면 되기 때문에 아무리 강타자가 잇는 타순이라도 혼자 있으면 그 힘이 발휘되기 힘들다. 암튼, 왕정치 혼자 있는 중심 타선을 보강하기위해,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퍼시픽리그 최고타자 장훈 선수를 모셔오게된다. 이로서 「OH타선」이 만들어 지는데, 여기서 「H」는 장훈 선수의 일본 이름인 「하리모토」에서 따온 것인데, 얼마나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나가시마 감독이 장훈 선수를 원했는지, 당시 장훈 선수가 몸담고 있던, 니혼햄의 오자와 감독( 나가시마 감독의 릿쿄대 선배) 에게 직접 장훈 선수의 요미우리 트레이드를 요청하지만 거절당한다. 그러자 이번에는 구단주까지 찾아가 설득함으로서 결국 트레이드를 성사 시키게 된다. 이미 이당시 장훈 선수의 나이는 30대 중반을 넘어 서고 있었음으로, 나이가 있는 선수를 데리고 오고 싶어 하지는 안았을 테고, 꼴찌를 기록한 감독이었으니, 그만큼 절실하게 믿을 만한 선수가 필요했을 것이다.


위의 사진은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홈페이지에 실려있는 사진이다.

打者に必要な全てを兼ね備えた天才打者だった。 타자에게 필요한 모두를 겸비한 천재 타자였다。

장훈 선수는 76년 자이언츠로 이적 했으니, 우리나이로 이미 37이었는데도 요미우리 입단후 맹활약을 펼친다. 결과적으로 나가시마에게 76,77 쎈트럴 리그 우승을 안겨주는데 공헌하였지만, 실력보다 명성이 부풀려져 있던 나가시마 감독이 이끌던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재팬 시리즈에서 76, 77 모두 한큐 브레이브스에 시리즈 스코어 4-3, 4-1로 무릎을 꿇고 만다. 아무리 생각해도 감독의 운영 미숙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다시 한번 드는 건 왜일까?



지금까지 실력 하나로 순탄한 프로 생활을 한듯 보이는 장훈 선수의 기록들 ....그러나 가려진 고난의 기록과 또 치열한 승부 그리고 통산 3085 안타라는 불멸의 기록까지는 다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