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지난주에 장선수에 대한 글을 썼다가 지웠다.
고인에 대하여 뭐라고 말하기엔 나 스스로가 자격 미달이라는 생각도 있었고 너무나도 파란 만장한 인생이기에 양도 많았기 때문인데........
결정적인 이유는 Esc키를 실수로 누르는 바람에 -.-
그런데 오늘 스포츠 뉴스에서 "시즌 최다승과 시즌 최다패를 기록한 선수가 누구였는지 아십니까?" 란 질문과 함께 장선수의 기사가 나오면서 좀 늦은 감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선수는 그 당시와 어울리지 않는 프로선수이다. 일본 쎈트럴 리그의 히로시파 카프의 에이스로서 두차례나 15승을 거둔적도 있고 재팬 시리즈 우승까지 경험한 투수였다. 당시에 최고연봉이던 박철순 선수의 연봉이 2천4백만원인데 장선수는 무려 1억 2천만원이였으니 그야말로 특급 대우인 셈이였다. 삼미와 협상중에 그의 프로의식은 삼미 관계자들을 당황하게 하는데 그것은 일본에서 전지 훈련중이던 삼성의 전지 훈련장을 찾아가서 배팅볼 투수를 해준것. 그러나 장선수는 한국 타자들의 수준이 궁굼했던 것이다.
한국에 오자마자, 그가 요구한 것은 타자 분석 자료였으나 당시엔 그런서조차 없을 시절이니 장선수는 혼자 타자들을 분석하면서 자신만의 자료를 만들어 나가는데, 시범경기를 100%활용한다. 시범경기 동안, 자신의 전력은 숨기면서 직구로만 승부한다. 시범경기 결과는 당연히 안좋았지만, 장선수는 타자들을 분석하고 있었던 것이다.
입단 첫해 1983년 그의 기록은 야구만화의 기록과 비슷할 정도로 놀라운 기록을 세우는데
당시 한해의 게임수는 100게임 그는 무려 60 게임에 출전하면서 30승을 채긴다. (1억원 보너스 얘기는 여기서 생략 ) 투구 이닝수는 무려 427 1/3이닝, 경기수가 130여 경기로 늘어난 요즘도 200 이닝을 한계로 잡고 있는 걸로 보면 정말 '철완'이다.
또한 그는 지능적인 투구에 능했다. 당시 145의 직구 구속을 갖고 있었음으로 다양한 구질을 섞어쓰면 효과는 배가되었던것. 그러나 전력 투구는 클린업 트리오를 만낫을때만 하고 하위 타순은 맞춰 잡는 식이였으니 최다이닝 최다승이라는 기록이 가능했던 것이다.
박찬호 김병현등 좋은 투수들이 해외로 빠져 나가면 타자 수준은 떨어진다. 좋은 투수들과 상대하는 기회가 없어지기 때문인데, 반대로 좋은 투수가 들어온다면 어떨까? 타자의 수준과 투수의 수준도 상승한다. 전체적인 야구의 발전인것이다. 장명부 선수는 그런 공헌을 한것이다.
장명부 선의 일본이름으로 웹검색을 했을때도 장선수의 사망기사가 올라와 있었다. 장명부 선수는 1970년 부터 1982년까지 무려 13 시즌을 뛴 백전 노장이였다. 어쩌면 한국에서 마지막 야구인생을 택했는지도 모른다.
재일교포와 ( 다른 남다른 경험이 있긴 하지만 ) 아무런 인연이 없음에도 장훈 선수를 좋아하는 나는 이상하게도 재일교포에 대한 연민이 있다. 장명부 선수도 그랬다.
재일 동포라는 이유로 신인 드래프트에 참가하지 못하고 68년에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연습생으로 입단해 프로의 꿈을 키워나는데 1970년 부터 1972년까지 요미우리에서의 성적은 신통치가 않았다. 그후 난카이에서 시작한 선수 생활은 1973-1976까지 7승, 9승의 상승세를 보이다가 난카이에서 최고 성적인 11승을 거두지만 이듬해 6승으로 하락세를 보이자 난카이는 장명부 선수를 히로시마로 보낸다. 히로시마에서의 성적은 15승을 무려 두번이나 거두지만 이미 그의 나이는 32세, 요즘에는 많은 나이라 할순 없지만 당시 선수로서는 환갑 나이였다.
장선수를 비난 하는 사람들도 있다. 돈때문에 열심히한 선수라는 얘기도 있다. 연봉은 단순히 돈이 아닌 선수의 실력을 수치로 보여준다. 또 누가 돈을 싫어하는가? 게다가 장선수는 구단에 배신감을 느겼을 것이다. 실력이 조금 떨어지자 기다려 주지 못한 구단에 대한 원망이 있었을 것이며, 조선인 연습생으로 시작한 그의 프로 인생은 고국에서 남다른 대우를 바라고 있었을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고국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 모습으로 보였다.
명복을 빕니다.
고인에 대하여 뭐라고 말하기엔 나 스스로가 자격 미달이라는 생각도 있었고 너무나도 파란 만장한 인생이기에 양도 많았기 때문인데........
결정적인 이유는 Esc키를 실수로 누르는 바람에 -.-
그런데 오늘 스포츠 뉴스에서 "시즌 최다승과 시즌 최다패를 기록한 선수가 누구였는지 아십니까?" 란 질문과 함께 장선수의 기사가 나오면서 좀 늦은 감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선수는 그 당시와 어울리지 않는 프로선수이다. 일본 쎈트럴 리그의 히로시파 카프의 에이스로서 두차례나 15승을 거둔적도 있고 재팬 시리즈 우승까지 경험한 투수였다. 당시에 최고연봉이던 박철순 선수의 연봉이 2천4백만원인데 장선수는 무려 1억 2천만원이였으니 그야말로 특급 대우인 셈이였다. 삼미와 협상중에 그의 프로의식은 삼미 관계자들을 당황하게 하는데 그것은 일본에서 전지 훈련중이던 삼성의 전지 훈련장을 찾아가서 배팅볼 투수를 해준것. 그러나 장선수는 한국 타자들의 수준이 궁굼했던 것이다.
한국에 오자마자, 그가 요구한 것은 타자 분석 자료였으나 당시엔 그런서조차 없을 시절이니 장선수는 혼자 타자들을 분석하면서 자신만의 자료를 만들어 나가는데, 시범경기를 100%활용한다. 시범경기 동안, 자신의 전력은 숨기면서 직구로만 승부한다. 시범경기 결과는 당연히 안좋았지만, 장선수는 타자들을 분석하고 있었던 것이다.
입단 첫해 1983년 그의 기록은 야구만화의 기록과 비슷할 정도로 놀라운 기록을 세우는데
당시 한해의 게임수는 100게임 그는 무려 60 게임에 출전하면서 30승을 채긴다. (1억원 보너스 얘기는 여기서 생략 ) 투구 이닝수는 무려 427 1/3이닝, 경기수가 130여 경기로 늘어난 요즘도 200 이닝을 한계로 잡고 있는 걸로 보면 정말 '철완'이다.
또한 그는 지능적인 투구에 능했다. 당시 145의 직구 구속을 갖고 있었음으로 다양한 구질을 섞어쓰면 효과는 배가되었던것. 그러나 전력 투구는 클린업 트리오를 만낫을때만 하고 하위 타순은 맞춰 잡는 식이였으니 최다이닝 최다승이라는 기록이 가능했던 것이다.
박찬호 김병현등 좋은 투수들이 해외로 빠져 나가면 타자 수준은 떨어진다. 좋은 투수들과 상대하는 기회가 없어지기 때문인데, 반대로 좋은 투수가 들어온다면 어떨까? 타자의 수준과 투수의 수준도 상승한다. 전체적인 야구의 발전인것이다. 장명부 선수는 그런 공헌을 한것이다.
장명부 선의 일본이름으로 웹검색을 했을때도 장선수의 사망기사가 올라와 있었다. 장명부 선수는 1970년 부터 1982년까지 무려 13 시즌을 뛴 백전 노장이였다. 어쩌면 한국에서 마지막 야구인생을 택했는지도 모른다.
재일교포와 ( 다른 남다른 경험이 있긴 하지만 ) 아무런 인연이 없음에도 장훈 선수를 좋아하는 나는 이상하게도 재일교포에 대한 연민이 있다. 장명부 선수도 그랬다.
재일 동포라는 이유로 신인 드래프트에 참가하지 못하고 68년에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연습생으로 입단해 프로의 꿈을 키워나는데 1970년 부터 1972년까지 요미우리에서의 성적은 신통치가 않았다. 그후 난카이에서 시작한 선수 생활은 1973-1976까지 7승, 9승의 상승세를 보이다가 난카이에서 최고 성적인 11승을 거두지만 이듬해 6승으로 하락세를 보이자 난카이는 장명부 선수를 히로시마로 보낸다. 히로시마에서의 성적은 15승을 무려 두번이나 거두지만 이미 그의 나이는 32세, 요즘에는 많은 나이라 할순 없지만 당시 선수로서는 환갑 나이였다.
장선수를 비난 하는 사람들도 있다. 돈때문에 열심히한 선수라는 얘기도 있다. 연봉은 단순히 돈이 아닌 선수의 실력을 수치로 보여준다. 또 누가 돈을 싫어하는가? 게다가 장선수는 구단에 배신감을 느겼을 것이다. 실력이 조금 떨어지자 기다려 주지 못한 구단에 대한 원망이 있었을 것이며, 조선인 연습생으로 시작한 그의 프로 인생은 고국에서 남다른 대우를 바라고 있었을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고국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 모습으로 보였다.
명복을 빕니다.